오늘 아침, 어제가지 받은 편지들을 부엌에 들어가 죄다 태웠다. 입춘도 지났으니 편지를 담아두었던 광주리도 텅 비워두고 싶어서였다. 굴뚝에서 편지 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면서 저것은 ‘말의 연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궁이에서는 또 말의 재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사람의 말이란 결국 이런 연기와 재로 사라지는가 싶으나, 말 한 마디, 글 한 줄 쓰는 일이 새삼스레 허무한 짓거리로 느껴졌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이 존엄성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과 그 존엄성에 대한 말이 일찍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런 주장들이 쇠귀에 경 읽듯이 한낱 말의 연기와 재로 사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막상 우리 눈앞에 끔찍한 현실로 써 드러나자 새삼스럽게 오늘의 우리 삶을 묻게 된 것이다.

    한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일부 못된 소장수들이 소를 잡을 때 물을 잔뜩 먹여 죽인 일이 있었다. 소값을 더 받기 위해 말 못하는 짐승한테 그런 몹쓸 짓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수사기관에서 생사람을 고문으로 물을 먹여 죽이고 있다. 짐승도 못할 짓을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가는 버젓한 경찰 공무원이 공권력을 등에 업고 무자비한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 부산 형제 복지원인가 하는 데서는 떠돌이도 아닌 멀쩡한 사람들까지 잡아 가두어두고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니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보사부가 그런 집단의 장에게 군민포장과 국민훈장까지 받도록 추천해 주었다니,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웃기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또 이런 인물을 TV 인간 드라마에 출연시키는가 하면, 어떤 종교잡지에서는 표지 인물로 선정하여 ‘주리고 목마른 이들과 함께함은 주께서 내게 명령한 사명’이라고 말하게 했다니, 매스컴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가 내세우는 주는 어떤 주인가를 또한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정의사회와 선진조국을 지향하는 이 땅에서 ‘세계는 서울로 우리의 1년은 세계의 10년’이라고 우렁차게 외쳐대는 이 마당에,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끔찍한 일들이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엊그제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일찍부터 이미 있어 왔고 묵인되어 왔었다는 엄연한 사실에 우리는 더욱 울분을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그런 사실이 오늘 일반에게 알려졌을 따름이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내 자신에게 몇 번이고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사람인 처지에서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르기가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럽다.

    겪어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이렇다 할 죄상도 없이 자기네와 다른 뜻을 지녔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끌려가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고 치욕적인 심문을 당할 때, 무엇보다도 슬픈 사실은 어떻게 똑같은 인간끼리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사람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연민의 정마저 우러날 때가 있다.

    악몽처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들 있어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국가안보의 이름 아래 인격적인 모멸과 참기 어려운 곤욕을 치렀는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의심하고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하고 돕고 사랑하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 이렇게 만난 이웃들이기에 사람답게 살 수 있으려면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마음 놓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듣기 좋고 번드레한 법과 제도를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런 법과 제도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누구를 위한 사회질서며 국가안보이겠는가. 사람의 질서와 인간의 안보가 소홀히 되는 그런 질서와 안보는 한낱 통치의 방편과 수단으로 오용되기 쉽다. 나라와 정권의 안보에 앞서 인간의 안보가 우선되는 사회야말로, 나라와 정권의 안보도 함께 유지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두고 절망하는 의견들이 없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엊그제도 신문사에 있는 분이 찾아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나라의 장래를 두고 말한 바 있지만, 현재의 자를 가지고 우리 미래를 재서는 안 될 것이다.

    8.15 이후 40여 년 동안 정치와 교육제도와 그리고 국산영화만은 한결같이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지만, 그 밖의 다른 영역은 날로 향상하고 발전되어 가고 있다. 우서 ㄴ우리 국민들의 평균적인 자질과 의식이 많이 깨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동, 아프리카, 알래스카 같은 어려운 생활환경 아래서가지 꺾일 줄 모르고 피땀 흘려 일하는 우리 근로자들을 볼 때, 이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암담하다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이 겨레의 막강한 잠재력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뭣보다도 우리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일은, 자기 한 몸의 안위도 잊은 채 불의 앞에 항거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권 담당자들에게는 심히 귀찮은 존재들로 생각되겠지만, 이 겨레의 장래를 두고 생각할 때 고무적이고 희망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서 드러나고 있는 비정한 일들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의 방향을 돌려서 살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국민의 평균적인 수득이 다소 향상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자칫 자만에 빠져 현실인식에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진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양식과 사고에 허술함은 없었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부피에만 딴눈을 파느라고 삶의 질을 까맣게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그릇이 있다. 그릇이 차면 넘치게 마련이다. 이것은 도리요 우주질서다. 사람들은 자기 분수인 그 그릇을 모르고 함부로 과욕을 부리다가 그 과욕에 스스로 채어 넘어진다. 이런 이치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예외일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또 명심할 일은, 어떤 사회연상을 그 단면만 보고 성급히 속단해서는 안 된다. 전체의 흐름 위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시야를 넓힌다면 인류 역사의 진행 과정으로 내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

    어떤 위정자들이건 간에 체제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체의 흐름을 내다볼 줄 모른다면,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때움질만 하다가 마침내는 전체의 흐름 앞에 넘어지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거짓이나 임시방편에는 더 속지 않을 만큼 많이 성숙해졌다. 제도화된 일부 신문이다 방송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현실 인식이 박약하거나 낙관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계층뿐이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더욱 솔직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정책이 일반 국민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책상을 한 번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상투적인 속임수에 속을 국민은 이제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허위에 찬 책임 있는 공직자의 이런 말도 또한 한낱 연기와 재로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닌가. 어디 말뿐이겠는가. 우리들 자신도 언젠가는 한 줄기 연기와 한줌의 재로 이 땅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가둔 자건 갇힌 자건, 다스리는 자건, 다스림을 받는 자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모두 다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서로 믿고 의지하고 돕고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길 아니겠는가. 너무 비관할 것 없다. 그렇다고 자만도 금물이다. 그저 사람 노릇 잘하면 사람이 된다.

<87 . 3>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