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창문을 발랐다. 모처럼 날씨가 화창해서 바람기도 없고 햇볕이 따뜻해 잘 말랐다. 여느 때 같으면 대개 추석 전에 창문을 바르는데, 올해는 그 무렵에 연일 날씨가 궂어 시기를 넘기고 말았다.

   혼자서 창문을 바르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차분하고 느긋해진다. 새로 바른 창호처럼 기분도 아늑하고 정결하다. 종이를 파는 지물포에서 창호지와 풀을 구해 오고, 문 크기를 자로 재어 미리 종이를 재단해 놓는다. 그러고 나서 문을 떼어내어 낡은 창호지에 풀비로 물을 묻혀 불린다.

   한 5분 지나 가장자리에서부터 칼끝으로 창호지를 들추면 물에 불린 종이는 깨끗하게 떨어진다. 이때 온 장이 그대로 떨어지면 그 솜씨가 대견해서 기분이 아주 좋다.

   그런데 도배사들이 발라 놓은 창문은 그들의 편의대로 대개 화학 풀(본드)을 쓰기 때문에, 다시 창문을 바를 때는 종이가 잘 떼어지지 않아 애를 먹는다. 창문에 바르는 풀은 밀가루 풀이어야 뒤탈이 없고 종이도 잘 펴진다.

   낡은 창호지를 떼어낸 창문은 물걸레로 먼지를 닦아낸 다음 말려서 발라야 한다. 이때 창살에 물기가 남아 있으면 새 창호지에 그 얼룩이 누렇게 배어 나온다. 종이가 모자라 잇댈 때는 그이음새가 창살과 일치하도록 겹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께름칙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새로 바른 창은 햇볕에 풀기가 가실 때까지 말린다. 그런데 이 때 따가운 가을 햇볕에 너무 오래 두게 되면 종이의 이음새가 떨어지는 일이 있으니 풀기가 마르면 문을 제자리에 달아 두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이 창문 바르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의 창문은 남에게 맡기지 말고 손수 발라보라는 뜻에서다. 예전에는 직업적인 도배사가 따로 있지 않고 집집마다 손수 발랐었다. 요즘은 한옥이 사라져가고, 또 창문이 구조가 창호지가 아닌 유리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창호는 보기 드물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내가 거처하는 방의 창문은 손수 발라 왔기 때문에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고쳐 바를 수 있는 기량을 지니게 되었다.

   자신이 거처하는 방의 도배를 손수 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자신이 입는 옷을 손수 마름질하고 바느질해서 입는 그 느낌도 어쩌면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오두막의 창문은 이 집에 어울리게 모두 띠살창호다. 띠살창이란 문 울거미에 가는 살을 똑같이 좁은 간격으로 수직으로 짜 넣고, 수평 방향으로 서너 줄씩 상.중.하 세곳에 띠 모양으로 댄 창호를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창문은 용用자창이지만, 덧문이 없는 이 오두막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불일암의 창문은 앞마루가 있고 덧문이 있어 미닫이로 된 용자창이 제격이다. 용자살이 가장 단순하고 정갈할 뿐 아니라 실내조명도 밝다. 그리고 상하좌우 이른바 황금률이 적용된 쾌적한 비례의 아름다움은, 온갖 기교를 부린 그 어떤 창살보다도 그 격이 높다. 여러 형태의 창문 중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창이 용자창이라고 여겨진다. 방안에 불이 켜졌을 때 밖에서 바라보는 용자창은 참으로 조용하고 편안하게 보인다.

   창문은 그 집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창문이 어디에 달렸느냐에 따라 그 집의 모습과 분위기는 달라진다. 물론 창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고, 조명과 혼기의 기능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인 용도 이외에 눈으로 보아서 벽면과의 비례로 인해 아늑하고 푸근하고 정다운 그런 정서적인 기능도 하고 있다.

   밝은 햇살이 스며드는 그런 창 아래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시간도 아깝지 않다. 저절로 창 밖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창아래서 가랑잎 구르는 소리도 듣고 풀벌레 우는 소리에도 귀를 모은다. 부스럭거리면서 짐승이 지나가는 소리도 듣고 가을을 재혹하는 찬비 뿌리는 소리도 듣는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 생각없이 무심히 밝은 창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창을 두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우리 방은 창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하기도 어렵다
진귀한 고서를 펼쳐 서권기書卷氣나 기를까
나의 추와 미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고와 낙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니 나의 임종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평소에 창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좌선을 하고 고서를 읽으면서 살아온 시인이라, 생애를 막음하는 순간도 창 앞에서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창문은 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관문이기도 하다.

   불이 환히 밝혀진 창은 우리가 그 창문을 바라보기 전부터 그창이 먼저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집의 눈이 그 집 안에 사는 우리를 살피고 있다. 그런 창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일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바늘구명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고 하니 묻힌 김에 풍지까지 마저 발랐다. 겨울밤 눈바람이 몰아칠 때면 이따금 이문풍지가 운다. 갑작스런 이 소리에 놀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몹시 구슬프게 들려서 하던 일을 멈추고 물끄러미 눈길을 줄 때도 있다.

   한옥은 구조적으로 바깥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창호지 한 장으로 외부와 접해 있으니, 산속에서는 산의 일부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바람 소리 물소리며 새와 짐승들의 동정에도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된다. 어쩌면 창문 밖에서 어정거리는 토끼나 노루도 방 안에 있는 내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 모르겠다.

   새로 바르기 위해 창문에서 떼어 낸 낡은 창호지를 예전에는 결코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내가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물에 젖은 그 종이를 햇볕에 말렸다가 낱낱이 오려서 노紙종이:지繩노끈:승를 꼬았다. 거기에 촛농을 묻혀 촛불을 붙이는 용심지로 썼다. 그리고 어떤 노스님들은 여가에 그 노를 방석을 짜기도 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물건 아끼는 습관이 사라져, 절에서도 헌 문종이를 아궁이에 군불 지필 때 불쏘시개로나 쓰고 있다. 옛 어른들이 보시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오늘의 우리는 이와 같이 물건 아낄 줄을 모른다. 어디 물건뿐이겠는가, 복과 덕을 지을 줄은 모르고 함부로 까먹기만 하고 있지 않는가.

   새로 바른 정갈한 창문 아래서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었다. 벌써 오래 전에 이 책을 펼쳤다가 지루하고 관념적인 '서문'에 질려서 그만 책장을 덮어 버리고 말았었다. 최근에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책을 구해다가 읽게 되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맑은 정신으로 읽히는 양서임을 뒤늦게 알았다. ‘이 세계의 신비스러운 내면에서는 호흡의 들숨과 날숨이, 하늘과 땅이, 그리고 음과 양이 서로 어우러짐으로써 무언가 신성한 것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세상의 대립된 양극은 우주적인 조화와 질서로 인해 그 생명력과 신비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입을 빌려 '명랑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랑성은 지고의 인식과 사랑, 모든 현실에 대한 긍정이다. 모든 심연의 기슭에 서서 자각하는 일이다. 나이를 먹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밝아지는 것, 그것은 미의 비밀이고 모든 예술의 본질이기도 하다. 속세의 초월자나 붓다의 미소와 같은 것. 심원한 인물은 한결같이 명랑성을 지니고 있다.’

   명랑성은 집으로 치면 창문과 같은 것. 창이 밝아야 그 집 안의 어둔 구석이 사라진다.

   우리가 지닌 그 명랑성으로 한 사람을 행복하고 즐겁게 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건 말건 그렇게 해주는 것이 이웃된 도리일 거라고, 새로 바른 창 아래서 생각을 펼쳤다.
 
<95 .11>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