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그토록 무성하던 잎들은 서릿바람에 다 지고, 빈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묵묵히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묵은 잎을 떨쳐버리지 않고는 새잎을 펼쳐 낼 수 없는 이 엄숙한 생명의 원리를 지켜보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와 둘레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들 안에서, 혹은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모두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 뜻을 우리들 삶의 교훈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다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진직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가 터지면서 사람들은 허탈과 분노와 실의에 빠져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한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돈의 단위로 인해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익혀 온 돈의 개념에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권력과 금력의 어두운 상관관계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대다수 순진한 국민들에게, 이번 일은 적잖은 혼란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권력을 이용한 이 세기적인 부정 축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지, 허탈과 분노와 실의를 딛고서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있어야 한다. 얼마 만큼이면 만족할 수 있는가. 현대인들은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하나를 가지면 열을 가지려 하고, 열을 갖게 되면 또 백을 원한다. 그리고 가진 것만큼 행복할 수 있는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허황한 탐욕일 뿐 참으로 가진 것이 아니다.

   <법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욕망에는 짧은 쾌락에
많은 고통이 따른다.


   우리는 '내 것'이라고 집착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한다. 누구에게 빼앗길까 봐 어디로 새어 나갈까 봐서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다만 한때 맡아서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도 영원한 존재가 아닌데 자신이 지닌 것들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돈이나 물건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 이웃과 함께 그 혜택을 고루 나누어 가지면 관리 기간이 연장되지만, 탐욕의 수단으로 묵혀 두면 그 돈과 물건에 '곰팡이'가 슬어 그 빛을 잃는다. 어디 그뿐인가. 그 재물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단박 회수되고 만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얼마만한 재물이 필요할까? 개인이 쓸 수 있는 것은 한도가 있다. 그 밖의 것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나누고 누려야 할 세상의 공유물이다. 사람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그것을 가려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어디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이들은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곧바로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손에 넣기만 하면 행복한가이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결코 차지하고 갖는 데에만 있지 않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워졌느냐에 있다.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다운 삶을 조촐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하고 만다. 돈이나 물질에 집착하면 그 돈과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힌두교 성전인<우파니샤드>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다름 아닌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은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죽은 다음에 그는 그가 평소에 익힌 행위(業)의 미묘한 인상을 마음에 지닌 채 다음 세상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의 행위들의 열매를 그곳에서 거둔 다음 그는 이 행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와 같이 욕망을 가진 자는 윤회(환생)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생사윤회의 근본 요인을 탐욕이라고 한다. 분수 밖의 욕구가 탐욕이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걱정 근심도 많다. 그러나 탐욕이 적은 사람은 기를 쓰고 차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도 적다.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여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 만족할 줄을 모른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것마저도 읽게 될 것이다.

   사람이 어디 천년만년 살 수 있는 그런 존재인가. 적어도 이 몸을 가지고는 일회적인 삶을 산다. 내 자신의 한 번뿐인 그 삶을 남의 삶에 견주기 때문에 거기에서 허탈과 분노와 실의가 생긴다. 이번 사건을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얼마만큼이면 만족할 수 있는가? 가을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이, 자신의 인생에서 나이가 하나씩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적게 가지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내려다보라.
 
<95 .12>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