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떠나는 계절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가을에 더욱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막혔던 사연들을 띄우고 예식장마다 만원을 사례하게 된다. 우리 절 주지 스님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 가을에 몇 번인가 주례를 서게 될 것이다.

   결혼을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일생에 단 한 번 모르고서 치를 형벌 같은 것이라고 씁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족 보존을 위해서라고 제법 인류학자 같은 말을 하는 이도 있다. 혹은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선량한 상식인은 훨씬 많다.

   여름내 보이지 않던 Z양이 며칠 전에 불쑥 나타났다. 전에 없이 말수가 많아진 그는 이 가을에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결혼 같은 것은 않겠다고 우기던 그라 장난삼아 이유를 물었더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늘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다는,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그 뜻에 복이 있으라 빌어 주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끼리 함께 있을 수 없을 때 인간사에는 그늘이 진다. 우수의 그늘이 진다.

   그런데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가 아닐까. 사람은 분명히 홀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을 때에도 혼자서 죽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도 혼자서 살 수밖에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저마다 홀로 서 있듯이, 지평선 위로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시인의 날개를 빌지 않더라도 알 만한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업(業)이 달라서 생각을 따로 해야 하고 행동도 같이할 수 없다.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인연의 주재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의 도그마이기에 앞서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되풀이될 우주 질서 같은 것.

   죽네 사네 세상이 떠들썩하게 만난 사람들도 그 맹목적인 열기가 가시고 나면, 빛이 바랜 자신들의 언동(言動)에 고소(苦笑)를 머금게 되는 것이 세상일 아닌가. 모든 현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늘 함께 있고 싶은 희망 사항이 지속하려면, 들여다보려고만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서로 얽어매기보다는 혼자 있게 할 일이다. 거문고가 한 가락에 울리면서도 그 줄은 따로따로이듯이. 그러한 떨어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69. 9. 6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