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남도를 한 바퀴 돌아왔다. 가는 데마다 꽃이 만발이었다. 산자락이나 언덕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보잘 것 없는 집들이지만, 그 주위에 청청한 대숲이 있고 대숲머리에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환하게 피어있는 걸 보니 결코 가난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지리산의 칠불사 운상선원은 둘레에 부속건물이 없이 선원만 한 채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산뜻하고 그윽했다. 선원 뜰 가에 그 줄기가 두 아름이 넘는 낙락장송이 한그루 서 있는데, 어찌나 훤칠하고 당당하게 보이던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훨훨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대지에 우뚝 선 그 소나무의 기상이, 영원처럼 솟아 있는 앞산의 봉우리들과 어울려 수도권의 생기와 평온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새봄과 함께 우리사회는 지금 새롭게 태어나려고 진통을 겪고 있다. 썩은 상처를 도려내지 않고는 새살이 돋아날 수 없다. 말로만 전해 듣던 부정부패의 그 실상을 우리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거쳐 왔던 체제의 허구성 앞에 허탈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사회에 만연했던 부정부패가 어디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부조리를 만들어 왔는지, 이번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교육계의 비리를 통해 그 일부나마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 온 우리사회의 얼굴이요 우리시대의 실체인가.

   분수 밖의 욕구인 탐욕은 목마른 허욕 일뿐 근원적으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본래 내 것이란 없는 법이니까. 어떤 개인의 소유라 할지라도 크게 보면 이 우주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감사히 받아 값있게 쓸 때 빛이 나고 묵혀두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소유란 그 사람이 한때 맡아가지고 관리하고 있는 것. 관리를 잘 하면 남에게도 덕이 되고 자신에게도 이롭다. 따라서 그 관리기간이 연장된다.

   그러나 그 「선물」을 욕심 사납게 독차지하거나 잘못관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당장 회수를 당한다. 이것이 우주질서요 이 세상의 어김없는 도리다. 신이 존재하고 인과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이, 이 대지가 어떻게 투기의 수단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땅은 생명을 키우고 생산과 창조에 땀 흘리는 사람들이 맡아서 경작하는 인간의 대지다. 이 땅이 바로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영원한 어머니다.

   대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소속될 수 없다. 땅은 수많은 생물들과 함께 우리 인류가 오랜 세월을 두고 땀 흘려 일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면서 의지해온 삶의 터전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언젠가는 돌아가 묻힐 곳 또한 이 대지다. 우리들 삶의 터전이요 어머니이며 돌아갈 곳인 이런 대지가 어떻게 투기의 수단이 되고 탐욕의 도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 대지 앞에서 항상 나그네로서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

   톨스토이의 러시아 민화집에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글이 있다. 탐욕스런 한 사나이가 지평선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한 치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걸음을 재촉하다가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마는, 소설의 끝은 다음과 같은 글로 맺고 있다.

   “바흠(주인공의 이름)의 하인은 괭이를 들고 주인을 위해 구덩이를 팠다. 그 구덩이는 바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단 2미터의 길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묻혔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보다 뜻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 인지, 그때그때 자신의 분수와 처지에서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소유를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정신생활을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요체다.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채 소유에 마음이 빼앗기면 눈이 흐려져 인간적인 마음이 움트기 어렵다.

   《유교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편안하다. 그런 사람은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국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분수와 처지를 돌아보고 만족할 줄을 알면 비록 가난 할지라도 그는 부자나 다름없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교훈이다. 욕망과 탐욕의 늪에 갇히게 되면 철철 넘치고 있는 신선하고 풍성한 우주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새 시대를 꽃피우려면 누구보다도 먼저 공직자들이 솔선해서 정직과 청빈의 덕을 지녀야 한다. 정직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믿으려고도 따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청빈이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덕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금욕원리가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인 감성에 뿌리내린 선비정신이며 적극적인 우주와의 합일 원리다.
 
1994. 5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