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이 한 분 나와 함께 겨울을 나고 있다. 안거에 들어가기 전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도반(道伴)이, 빈 산에 홀로 지낼 것을 생각해서 말벗이라도 하라고 기왕에 있던 분에서 포기가름을 해서 안겨준 것이다.

   나무와 꽃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방안에 화분을 들여놓는 일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벌써 오래 전, 다래헌(茶來軒) 시절에 난을 기르면서 터득한 지독한 집착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아는 분들이 나를 찾아올 때면 화분을 가지고 오는 일이 더러 있었다. 면전에서는 흔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그들이 산을 내려가고 나면 즉시로 새 인연 터를 골라 떠나보내곤 했다. 까닭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ㅇ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고집이 이 겨울 이 오두막에서는 난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말벗이라도 삼으라고 하던 도반의 살뜰한 뜻이 요 며칠 전부터 꽃대가 되어 솟아오르고 있다. 어느 날 밤 꿈에 난초분에 꽃대가 올라오는 걸 보았는데, 다음날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꽃대가 두 군데서 솟아올랐다. 그 뒤부터는 말벗뿐이 아니라 눈길의 벗이 되어 한결 가까이 보살피게 된다.

   모든 살아 잇는 생물이 다 그렇듯이 식물도 마음을 기울여 보살펴주면 건강하게 잘 자란다. 낮에는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아래 두고 눈길을 보내면서 두런두런 말도 걸다가, 밤에는 방안의 온도가 난에게는 답답할 것 같아 마루에 내놓고 잘 자라고 밤인사를 나눈다.

   차(녹차)를 마시고 난 찌꺼기를 찻잔을 씻을 물과 함께 버리지 않고 오지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한참 삭힌 뒤에 암갈색으로 우러난 그 물을 한 닷새에 한번 꼴로 서너 숟갈씩 화분에 주면 난은 아주 좋아라 한다. 윤기가 도는 그 청청한 잎을 보면 난의 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식물에도 마음이 있느냐고? 암, 있고말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는 저마다 형태가 달라서이지 영(靈)이, 그 마음이 깃들어 있다. 산 것과 죽은 것의 구분은 영이 깃들어 있느냐 나가버렸느냐에 달렸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기준으로만 속단하기 쉬운데, 인간은 이 무변광대한 우주의 큰 생명체에서 나누어진 한 지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최근에 나는 흥미 있는 책을 한권 읽었는데, 정신세계사에서 펴낸 <식물의 신비생활>(피터 톰킨스, 크리스토퍼 버드 공저)이다.

   거기 보면 식물도 우리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것이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버린다는 실험결과를 싣고 있다. 또 어떤 식물은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을 좋아하고, 어떤 식물은 시끄러운 록음악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식물도 생각한다’ ‘인간의 마음을 읽는 식물’ ‘식물과의 의사소통’ ‘우주와 교신하는 식물들의 초감각적 지각’ 등 식물의 초감각적 지각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著者)도 머리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가 산에 가거나 나무나 꽃과 함께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차분해지고 아늑한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식물은 우리가 함께 기대고 있는 이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있는 생명체이다. 인간의 처지에서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식물이 지닌 영적인 영역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식물은 우리 인간에게 양식과 맑은 공기를 비롯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유익한 에너지를 무상으로 공급해 주고 있다.

   자연과 교감을 하면서 살아온 미국 인디언들은 과로해서 기운이 달리게 되면 숲속으로 들어가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친구도 도시생활에 지치면 시골집에 내려가 집 뒤 소나무 숲을 찾아간다. 정정한 한 소나무에게 안부를 묻고 거기 한참을 기대어 속말을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투명해지고 기운이 솟는다고 했다.

   나도 불일암의 뜰에 있는 후박나무를, 잎이 다 지고 난 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나무를 쓰다듬고 안아주면서 볼을 부비기도 하고 속엣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신뢰와 친근감을 우리는 서로 나눈다. 아, 이 겨울에 우리 후박나무는 별고 없이 잘 있는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제2부 식물의 왕국에 문을 연 선구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인도의 뛰어난 식물 연구가 찬드라 보스는 한 학술모임에서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진리가 머물고 있는 이 광막한 자연이라는 거주지에는 각기의 문이 달린 수많은 통로들이 있다. 물리학자, 화학자, 생리학자들은 자신들만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이 각기 다른 문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다른 분야와는 관계가 없는 자기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고집하면서.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지금 광물의 세계니, 식물의 세계니, 동물의 세계니 하면서 분야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깨뜨려져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탐색의 목표가 전체적인 앎에 도달하기 위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어떤 특수 전문분야라 할지라도 인간의 삶을 위한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그것은 한 곁가지를 붙드는 일에 그치고 말 것이다.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전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페히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의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 서로를 분간하듯이 꽃들은 향기로써 서로를 분간하며 대화한다. 꽃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하다. 사실 인간의 말이나 숨결은 사랑하는 연인 끼리를 제외하고는 꽃만큼 미묘한 감정과 좋은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금세기 최고의 식물 재배가로 일컬어진 켈리포니아의 푸더 버뱅크는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넵니다. 식물에게는 스무 가지도 넘는 지각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인장에 관한 실험 이야기인데, 나는 처음 집게로 선인장의 가시를 뽑아주면서 선인장에게 수시로 말을 걸어 사랑의 진동을 일으켜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그러니 너는 이제 가시 따위는 필요 없어. 내가 너를 잘 보살펴 줄 테니까.”

   그 결과 마침내 가시 없는 선인장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식물들이 어떤 종류의 텔레파시를 통해 자신의 뜻하는 바를 감지하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는 학부모들에게 말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책에 실린 지식을 강요하는 것보다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은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놀이나 자연과의 교류 등 기쁨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버뱅크는 자신의 성공은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로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작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 77세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대문을 뛰어넘고 달리기 시합을 하고 샹들리에를 걷어차기도 한다오. 그것은 아직도 청춘인 내 마음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늙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는 지금껏 어른이 된 적이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랬으면 싶소,”

   이글을 쓰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난(蘭). 꽃대를 재어보았더니 11.5센티미터, 어제보다 5밀리미터가 더 자랐다. 기특하다.
 
1993. 2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2015.04.20 (09:50:37)
[레벨:28]圓成
 
 
 

한구절 한구절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 자신이 어리석게도 지금껏 한 곁가지를 붙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은 생은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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