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감기를 묻혀와 한 열흘 호되게 앓았다. 죽을병이 아닌 한 앓을 만큼 앓아주면 추스르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몸의 자생력이다. 회복기의 그 여리고 투명한 상념들은 스치고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살아갈 일들을 착해진 마음으로 헤아리게 된다.

   앞산은 응달이라 아직도 눈이 허옇게 쌓여 있다. 처마 끝의 풍경을 울리고 지나가는 한줄기 부드러운 바람결이, 문득 남쪽의 따뜻한 햇살과 꽃을 그립게 했다. 그날로 털고 길을 나섰다. 입맛이 없을 때는 물을 갈아 먹어야 한다.

   3월 중순 선암사(전남 승주 조계산에 있는 절)의 매화는 아직 피어나지 않았었다. 끝가지에 한두 송이 피었다가 추위에 움츠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도 볼만하다. 활짝 피어 혼이 나가버린 꽃보다는 잔뜩 부풀어 오른 꽃망울 쪽이 어떤 충만감과 기대를 갖게 한다.

   선암사는 경내에 화목(花木)이 많고 고풍스런 옛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이따금 들르고 싶은 절이다. 요즘 큰 절들은 어디라고 따로 지칭할 것도 없이 막대한 돈을 들여가면서 도리어 절을 버려놓는 일이 허다한데, 이 선암사는 옛절의 분위기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찾는 이의 마음을 그윽하게 감싸준다.

   도량(수도원)이란 맑음과 고요와 평온과 조화가 깃드는 곳이다. 그런데 안목 없는 사찰의 경영자들이 공명심과 과시욕에만 치중한 나머지, 도량의 맑음과 고요와 평온과 조화를 깨뜨리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집들만 덩그러니 있고 그 안에 수행자가 머물지 않으면 그곳은 한낱 건물의 집합체일 뿐 수도원은 아니다.

   남해고속도로를 동쪽으로 달리다가 광양을 지나면 이윽고 옥곡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옥곡에서 내려 포장된 861번 지방도를 타고 북상하면 바른쪽에 섬진강이 흐른다. 왼쪽은 산이고 바른쪽은 강변에 군데군데 청청한 대숲이 우거져 남도 특유의 정서가 깃든 길을 다라 올라가면 길가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가 눈길을 끈다. 더러는 토담집 너머로 허옇게 꽃이 피어 있는 산촌의 꿈결 같은 풍경이 눈에 띌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봄직도 하다.

   광양군 다압면 섬진 윗마을. 왼쪽 산기슭이 온통 매화나무로 뒤덮인 것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길가에 ‘매화농원’이란 표시판을 따라 올라가면 수만 그루의 만개한 매화가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자못 황홀하다. 선암사에서는 아직 꽃망울이었는데, 섬진 윗마을의 매화는 때맞추어 활짝 피어 있었다.

   강 건너는 하동 땅.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화개장터가 나온다. 35년 전 쌍계사 탑전 시절, 강변의 길을 따라 구례장을 보러 다니던 그 무렵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강 건너 다압면 쪽에 이처럼 드넓은 매화농원이 있다는 것을 듣도 보지도 못했었다.

   이 매화농원은 70년 전에 김오천 씨가 일본에서 돌아올 때 밤나무와 함께 가져다 심은 묘목이 자라서 이처럼 황홀한 꽃동산을 이룬 것이다. 이 매화농원을 이룬 그 분은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제는 잠들어 있다. 하지만 매화를 사랑하고 애써 가꾼 그 분의 넋은 해마다 매화와 더불어 다시 피어나 이 농원이 있는 날까지 함께하리라 여겨진다. 나무를 심은 그 뜻은 수많은 세월을 두고 뒷사람들에게까지 덕화를 드리운다.

   이런 매화동산 한쪽 기슭에 한 칸 초막을 빌어, 매화철이 되면 섬진강을 내려다보면서 매화 향기 속에서 유유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남쪽에서 올라온다. 이른 봄 남도 특유의 부드러운 햇살과 산들거리는 바람결과 청청한 대숲과 구수한 토담과 은은한 꽃향기 등이 남도의 정서를 빚어내는 것이로구나 하고 현지에 와보면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집은 보잘것없는 토담에 둘러싸인 초옥이지만 그 뒤에 대숲이 있고 대숲머리에 살구꽃이나 매화 혹은 복숭아꽃이 피어 있으면 그 집이 결코 가난하게 보이지 않는다. 도시의 번듯한 양옥이나 아파트보다 인간의 주거환경으로서는 이런 시골집에 훨씬 마음이 끌린다. 우리네 전통적인 한국인의 푸근한 정서는 이런 주거환경과 농경에서 형성되었을 법하다. 내가 마음 붙여 살고 싶은 거처도 토담에 둘러싸인 이런 간소한 초옥이다.

   ‘땅끝’이란 지명이 언제부턴가 나에게 그리움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땅끝이란 어감이 이 세상의 끝처럼 들이었다. 4월 초 운전면허증 갱신이 가까워져 적성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순천에 가서 일을 마치고, 그 길로 땅끝을 찾아가기로 했다.

   순천에서 벌교, 보성, 장흥, 강진으로 이어진 2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산자락마다 진달래가 꽃사태를 이루고 집집마다 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강진에서 해남읍 쪽으로 가지 않고 813번 지방도를 타고 내려가다가 북평에서 13번 국도를 만나 서북쪽으로 8킬로미터쯤 달리면 왼쪽으로 땅끝(土末 )으로 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송지면 소재지 갈림길에서 좌회전, 우측으로 바다를 끼고 내려가면 소호리 해수욕장이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땅끝!

   땅끝이라니 바닷가는 다 육지의 끝일 텐데 어째서 이곳만이 유달리 '땅끝'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궁금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위도상 한반도의 최남단, 아하 이래서 옛사람들은 이곳을 땅끝이라고 불렀구나. 유식한 사람들을 위해 한자로는 흙토土, 끝 말末 토말이라 하고, 지도에는 갈두(葛頭)로 나와 있다.

   땅끝 산 위에 등대처럼 생긴 전망대가 있는데, 거기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면 이곳이 이름 그대로 땅끝임을 실감할 수 있다. 해변에는 토말탑이 세워져 있다. 하루 두 차례 오전 오후로 보길도(甫吉島)로 가는 카페리가 있다. 성급한 사람은 시간마다 있는 노화도를 거쳐서 보길도로 가면 시간이 단축될 것이다.

   한 10년 전 완도에 갔다가 당일치기로 보길도를 다녀온 일이 있는데, 그때는 고산孤山의 유적지인 부용동만을 들었었다. 그곳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내륙이었다. 보길도의 진주는 고개 너머 예송리(禮松里) 바닷가다. 아름드리 상록수림으로 둘러싸인 검은 조약돌 해안선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바닷가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조약돌밭에서 때마침 미역 말리는 일을 한참 구경했다. 짭짤한 갯바람에 묻어 풍겨오는 미역 냄새가 차 안에서 밴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해질녘 바닷가에 앉아 쏴아르륵 쏴아르륵 조약돌을 씻어 내리는 물결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니 잔잔한 음악을 듣는 것 같아 마음이 아주 느긋해졌다. 이런 소리는 종일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보길도는 요즘 어디서나 동백꽃이 한창이다. 가지마다 예전의 시골 '큰애기' 같은 수줍은 꽃을 달고 있고, 그 발치에는 수북이 낙화가 누워 있다. 동백꽃은 그 잎과 꽃이 조화를 이룬 아주 소박한 토속적인 꽃이다. 이 동백꽃 또한 남도의 정서를 이루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남은사(南隱寺)라는 절 이름이 마음에 들어 가파르고 비좁은 길을 올라갔었다. 게으른 중이 살 만한 곳인데, 절은 보잘것없지만 둘레의 상록수림이 아늑하다. 절 뒤로 5분쯤 올라가면 다도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남으로 추자도가 멀지 않고, 진도, 완도, 노화도, 소안도, 청산도가 지척이다.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도 가깝게 보인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오게 되면 바다에 펼쳐질 장엄한 일몰을 지켜보고 싶다. 남은사, 이런 곳에 묻혀 살면 저절로 은둔(隱遁)이 되겠다.

   동백의 섬 보길도를 떠나오면서 고산의 <어부사시사> 중 '춘사(春詞)'의 한 구절을 두런두런 뇌었었다.
 
우는 것이 벅구기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어촌 두어 집이 냇속에 들락날락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1993. 5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2015.04.22 (08:09:39)
[레벨:28]圓成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하던데,

백수 20여일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남도기행이라도 한 번 다녀왔으면

허전한 마음이 다소 위안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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