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리고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내 오두막에도 일손이 바빠진다. 캐다가 남긴 고구마를 마저 캐서 들여야 하고, 겨울 동안 난로에 지필 장작을 골라서 추녀 밑에 따로 쌓아놓아야 한다. 장작의 길이가 길면 난로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짧은 걸로 가리고 통으로 된 나무는 쪼개 놓아야 한다. 그리고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 관솔이 밴 소나무 장작을 잘게 쪼개 놓는다.

   산중의 겨울은 땔감만 넉넉하면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다. 양식이야 그때그때 날라다 먹으면 된다. 겨울 동안 수고해줄 무쇠난로를 들기름 걸레로 닦아주고, 연통의 틈새도 은박 테이프로 감아주었다.

   나는 기질적으로 미적지근한 날씨보다는 살갗이 얼얼한 쌀쌀한 날씨가 좋다. 내 삶에 긴장감이 돌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긴장감이 돌아야 산중에서 사는 맛이 난다.

   내가 홀로 사는 이유는 누구의 도움이나 방해를 받음 없이 홀가분하게 내 식대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있을 때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전에 살던 암자에 내려가 이틀이나 사흘을 머물다 오는 일이 있는데, 남이 해놓은 밥을 얻어먹는 편안함과 여럿이서 먹는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활의 리듬이 느슨해지는 것 같아 사흘 이상 머물지 않는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임없이 가꾸고 챙겨야 한다. 안팎으로 자신의 현 존재를 살피고 점검해야 한다. 핸들을 잡고 차를 몰고 가듯이 방심하지 말고, 자신을 운전해 가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꼴불견이 되기 쉽고 추해진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늘 새롭다. 새로워지려면 묵은 생각이나 낡은 틀에 갇혀 있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건 편하게 안주하면 곰팡이가 슬고 녹이 슨다.

   어느 날 일 끝에 개울가에서 흙 묻은 연장을 씻다가, 끝없이 흐르는 이 개울의 근원이 어디인지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신발을 바꾸어 신고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두 시간 가까이 상류로, 상류로 올라갔지만 그 흐름은 끝이 없었다. 이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이 세계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루어졌는데 개울물의 근원은 찾아 무엇 하겠는가.’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이 네 가지 요소로 이 몸도 이루어졌고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도 또한 지, 수, 화, 풍으로 이루어졌다. 이 네 가지를 떠나서 우리는 살 수 없다. 흙과 땅이 없다면 어디에 기대고 살겠는가. 물과 불 없이, 바람과 공기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 가을에 새삼스럽게도 흙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고랭지에서는 상품 가치가치가 없는 채소는 방치해 버린다. 오두막으로 올라오는 길에 배추밭이 있는데, 팔고 남은 이삭이 많아 가을 내내 뜯어다 국도 끓이고 김치도 담가 먹는다. 흙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신서한 채소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오르내리면서 한동안 역겨운 계분 냄새와 농약 냄새를 맡은 그 보상으로 이삭을 주워다 먹는구나 싶었다. 눈이 내려 쌓이고 강추위가 오기까지는 이삭 배추의 혜택은 계속해서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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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면 습한 개울가에 진남빛 용담이 핀다. 그 뿌리가 용의 쓸개보다도 더 쓰다고 해서 용담(龍膽)이란 이름이 생겼다는데, 그 용을 누가 보았단 말인가. 또 그 쓸개의 맛은 누가 보았는가. 이름에는 그런 허무맹랑한 것이 더러 있다.

   어쨌든 가을 야생화 중에서 용담은 산중의 귀한 꽃이다. 그런데 이 용담은 늘 입을 다문 채있다. 활짝 피어 있는 것을 지금껏 보지 못했다. 식물도감을 보아도 대부분 봉오리로 있는 것만을 싣고 있다.

   물을 길으러 개울가로 갈 때마다 발치에 유난히 여린 용담이 한 그루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눈여겨보면서 ‘잘 있었니?’ 하고 안부를 묻곤 했다. 둘레에 많은 용담이 건강하게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는데, 그 한 그루만 외떨어져 여리게 올라와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그 용담한테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아직 네 방을 구경하지 못했는데 문 좀 열어볼래?’

   그 이튿날 물을 길러 개울가에 갔더니 마침내 그 용담이 문을 열어주었다. 희고 가녀린 꽃술이 보였다. 처음으로 본 용담의 꽃술이다. 그 용담은, 그토록 가녀린 용담은 다른 용담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까지도 자리를 지키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사람의 눈길과 따뜻한 관심이 식물의 세계와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넨다. 식물에게는 20가지도 넘는 지각 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잇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지난여름 절 마당 한쪽에 버려진 덩굴식물이 눈에 띄어 그걸 주어다 화분에 심어 두었다. 최근에야 그 이름이 ‘싱고니움’이란 걸 알았다. 그때는 이파리가 두 잎뿐이었는데 한 잎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날마다 눈길을 부면서 목이 마를까 봐 물을 자주 주었다. 덩굴은 한참 만에 기운을 차리고 새 줄기와 잎을 내보였다. 받침대를 세워주고 차 찌꺼기 삭힌 물을 거름삼아 주었다.

   겨우 한 잎뿐이던 것이 지금은 30여 개나 되는 이파리와 두 자 반이 넘는 줄기로 무성하게 자라났다. 보살핌에 대한 그 보답을 지켜보면서,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잇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식물은 인간에게 유익한 에너지를 내보내고 있는데, 투명한 사람만이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기운이 달리면 숲속으로 들어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가까이해야 삶에 활기가 솟는다. 식물에서 삶의 신비를 배우고 기운을 받아들이라.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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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 아가씨랑 두런두런 대화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듯...

긴 여운이 남습니다.

향기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