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산중에는 불 때고 끓여 먹고 좌성하는 일이 주된 일과다. 몽고지방에 중심을 둔 한랭한 고기압이 끈덕지게 확장하던 그 무렵, 독(獨)살이에서 흔히 빠져들기 쉬운 게으름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참 혼이 났었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은 아무래도 방안에 앉아 있기가 따분해진다.

   마냥 내리는 눈으로 수묵(水墨)처럼 부옇게 흐려진 산봉우리와 숲을 내다보다가 무엇에 홀린 듯 숲길로 나섰다. 누더기에다 귀까지 내려쓴 털모자가 젖도록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짐승처럼 쏘다녔다. 때 아닌 인기척에 노루들이 튀고, 꿩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날았다. 산죽(山竹)밭에서는 토끼란 놈들이 연방 푸스럭거렸다. 천지가 얼어붙은 그 추위 속에서 너희들은 무얼 먹고 살아 남았느냐.

   암자로 돌아와 장작을 한 아름 아궁이에 지피었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젖은 옷을 말렸다.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생기가 피어난다. 무엇인가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 연장궤에서 톱과 망치와 자귀를 꺼내어 똑딱거린다. 골짜기에 쩌르렁쩌르렁 메아리가 울렸다. 바람이 지나간다. 무겁게 허리를 굽혔던 대숲이 일렁이면서 흩날리는 눈보라.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 다로(茶爐)에서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혼자서 마시는 차를 이속(離俗)이라 하던가. 아, 이 은은한 차맛을 그 누가 알까.

   ‘대숲에 내린 맑은 이슬을 두어 잔 마시니 삼매경에 접어든 손에 기이한 향기가 스며들더라’

   화경청적(和敬淸寂), 이 같은 차의 덕이 산중의 청한(淸寒)한 일상을 다스려주고 있다.

   ‘차를 마실 때는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그윽한 정취가 없어지느니라. 홀로 마시면 싱그럽고 둘이 마시면 한적하다. 서넛이 마시면 재미있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며 7, 8인이 마시면 나눠먹이와 같더라’ - 옛사람의 글에 실린 말씀.

   백스무 해나 장수한 조주 선가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차를 내놓았다. 어느 날 두 학인(學人)이 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와 인사를 드린다. 노사(老師)는 한 학인에게 “이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아니오, 처음입니다” “그래? 그럼 차나 한 잔 들지”하고 차를 내놓는다.

   이번에는 함께 온 학인을 보고 “그대는 전에 여기 온 일이 있는가?”라고 질문. “예. 한 번 왔었습니다.” “그럼 차나 한 잔 들게.” 하고 차를 내놓는다.

   곁에서 지켜보던 그 절의 원주(院主)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노스님, 이전에 온 이 없는 사람이나 다시 찾아온 사람에게 어째서 똑같이 차나 들라고 하십니까?”

   노사는 빤히 원주를 바라보다가 “원주!”하고 불렀다.

   원주는 깜짝 놀라 “예?” 하고 대답.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게”라고 말했다.

   주주의 차맛이 어떠했을까? 그 차맛을 알 수 있다면, 차나 마시고 가라던 선사의 그 뜻도 함께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선(禪)이 생활화되던 시절에는 빛과 향기와 맛을 갖춘 차도 성했다고 하는데, 요즘의 차맛은 어디를 가나 시원치 않다. 선(禪)이 선승(禪僧)만의 전유물인 양 선방에만 갇혀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1977 . 3>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