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 만치 살다가 인연이 다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유일한 증거로서 차디찬 육신을 남긴다. 혼이 나가버린 육신을 가리켜 어감은 안 좋지만 시체(屍體)라고 부른다. 육신을 흔히 영혼의 집이니 그림자이니, 그럴듯하게 표현하고들 있지만 평소에는 그걸 모른다. 막상 우리 곁에서 누군가 떨어져 나갔을 때 비로소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알맹이가 빠져버린 빈껍데기는 그것이 부모형제의 것이라 할지라도 거추장스러울 뿐. 죽음 앞에 슬퍼하면서도 지체 없이 장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검은 의식 또한 세상에서는 각양각색. 그 비용조차 없이 슬픔이 가중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호화롭고 거창한 의식을 통해 부(富)와 권세를 마음껏 과시하려는 부류들도 있다.

   불교의 수행승들은 마지막 남은 그 ‘증거’를 인멸시키는 데 비정하리만큼 철저하다. 화장을 하여 남은 유골마저 갈아서 흩어버린다. 살아서도 소홀히 하던 육신을 죽고 나서까지 홀대하고 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그대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어떤 선사는 그의 임종게(臨終偈)에서 이렇게 당부한다.

   ‘시주의 땅에 묻지 말고 태워 없애버리게’ - 가진 것 없이 살았던 그가 죽은 뒤 혹시 남의 신세를 질세라, 재를 만들어 흩어버릴 것이지 남의 땅을 차지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이다. 또 어떤 스님들은 도반들에게 폐를 끼치고 번거롭게 할까 봐, 깊숙한 산골에 손수 화장할 나무를 마련, 불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가는 일도 있다. 몇 해 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어떤 노스님은 큰 돌을 안고 바다에 들어가 꺼풀을 벗어버리기도 했다. 이를 수장(水葬)이라고 하는데, 남은 육신을 물고기들에게 보시(布施)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방법이 비단 출가 수행승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던 일본의 어떤 황후(皇后)는 자기가 죽거든 불에 태우지도 흙에 묻지도 말고 들가에 버려서 한때나마 주린 짐승들의 요깃거리가 되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었다.

   수행자라면 종파를 따질 것 없이, 그의 청빈(淸貧)을 본받지 않을 수 없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이 성인은 임종이 가까웠을 때 옷을 벗겨 알몸으로 땅바닥에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그 원장에게 어린애처럼 졸랐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오래지 않아 내 육신은 먼지와 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월간지에서 호화분묘(豪華墳墓)의 화보를 보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생시의 호화주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호화 유택(幽宅)을 마련한 것인가. 냉방시설을 갖춘 묘지가 있는가 하면, 외국산 대리석을 들여와 치장했다는 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풀장까지 갖추어 놓고, 석조물의 전시장처럼 보이는 묘지도 있었다. 그 안에서 고이 잠드시라 해놓았을 텐데, 양심이 있는 넋이라면 어찌 그런데서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근래 흔히 일고 잇는 성역화(聖域化)의 물결을 따라, 뒷사람들에게 수고와 폐를 끼칠 것 없이, 몸소 미리 해두자는 심사에서일까? 하기야 요즘은 중들까지 시류에 편승, 탑만으로는 모자라 일직이 없었던 석상(石像)까지 해 세우는 판이니 남의 말을 할 처지는 못 되지만-.

   해도 너무들 한다. 빈껍데기를 가지고 너무들 한다.
<1977 . 4>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