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되풀이만 같다. 하루 세끼 먹는 일과 자고 일어나는 동작이며 출퇴근의 규칙적인 시간관념 속에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온다. 때로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 혹은 후회를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상 그날이 그날 같은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간다.

   이와 같은 반복만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머지 허락받은 세월을 반납하고서라도 도중에서 뛰어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안으러 유심히 살펴보면 결코 그날이 그날일 수 없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또한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다행히도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가구가 아니며, 앉은 자리에서만 맴돌도록 만들어진 사계바늘도 아니다. 끝없이 변화하면서 생성되는 것이 생명 현상이라면, 개인의 의지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운문 선사가 보름날의 법회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십오일 이전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 십오일 이후에 대래서 한마디 일러보라.”

   한번 지나가버린 과거사는 묻지 않을 테니 그 대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말일 것이다. 여럿의 얼굴을 쭉 훑어보았지만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였다. 이윽고 선사는 자신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날이 말마다 좋은 날.

   하루하루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시들한 날이 아니라 늘 새로운 날이라는 뜻. 철저한 자각과 창조적인 노력으로 거듭거듭 태어나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늘 새로운 것이다.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하루 24시간의 부림을 당한다. 그러나 주어진 인생이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시시로 자각하는 사람은 그 24시간을 부릴 줄을 안다. 한쪽은 비슬비슬 끌려가는 삶이고 다른 한쪽은 당당하게 자기 몫을 이끌고 가는 인생인 것이다.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저마다 각기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럿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특성을 실현하여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초대받은 나그네들. 두 사람의 예수나 똑같은 석가모니는 필요가 없다. 개성과 기능이 각기 다른 인격끼리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다. 이와 같은 인간의 특성과 기능을 무시하고 외곬으로만 몰고 가려는 이념이나 주의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사를 반전(反轉)시키려는 반시대적인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둘레는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데 어떻게 좋은 날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사람은 도전을 받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 날이 날마다 좋은 날을 맞으려면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삶의 의미를 캐내야 한다. 하루하루를 남의 인생처럼 아무렇게나 살아버릴 것이 아니라, 내 몫을 새롭고 소중하게 살려야 한다. 되풀이되는 범속한 일상을 창조적으로 심화시키는 데서 좋은 날(好日)은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1977 . 10>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