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안거를 마치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며칠 동안 어정거리다가 돌아왔다. 전등불이 밝은 데서는 어쩐지 몰랐는데, 다시 등잔과 촛불을 켜게 되니 이곳이 바로 내가 사는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문명의 이기란 편리하다. 전기만 하더라도 인간이 발명해낸 여러 가지 문명의 연장들 중에서 큰 몫을 차지해 우리 생활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해주고 있다. 이제는 산 중이건 섬이건 전기가 안 들어간 곳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내 오두막에는 전기가 없다. 나는 이 점을 오히려 다행하게 여기고 있다.

   그 전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전기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내가 20년 전 옛터에 암자를 새로 짓고 살 때에도, 골짜기를 건너 산등성이 너머에서 전기를 끌어다 썼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떠한 환경이나 여건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누리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진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문명의 연장을 덜 의존하면서 자연의 상태대로 살고 싶다.

   이 오두막에 만약 전기가 들어와 있다고 가정해 보면, 상상만으로도 시들하고 맥이 빠진다. 전기가 들어오면 텔레비전이며 냉장고며 오디오 기기도 따라올 것이고, 오두막이 지닌 맑음과 고요와 단순성을 잃고 말 것이다. 나 같은 기질은 불편한 것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지만, 맑음과 고요를 잃게 되면 삶의 알맹이마저 빠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불편하고 모자람을 받아들이고 싶다. 문명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과 더 가까 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에는 독성이 들어있다. 문명은 점진적으로 사람을 시들게 만든다. 그러나 자연은 원초적인 것이고 건강한 것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의지처이다.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낸 문명이지만. 거기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그 문명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가 반드시 온다. 문명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내 오두막의 불 밝히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밝은 전등불 아래 길들여진 습관 때문에, 한동안은 몹시 답답하고 옹색하고 불편하게 여겨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었다. 이제는 그 안에서 전에 느끼지 못하던 아픔다움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

   산중에서 사는 수행자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저녁을 먹는다. 그래야 저녁 일과에 차질이 없다. 내 오두막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해가 빨리 기운다. 어쩌나 늦은 저녁 공양시간에는 대개 식탁에 초를 두 자루 켠다. 한 자루를 켤 때보다 두 자루를 켜놓으면 간단명료한 식탁이지만 훨씬 풍성하게 보인다. 식탁은 밝고 환해야 음식을 대하는 품위가 있다.

   음식을 익히고 그릇을 챙기는 주방에는 촛불을 밝히고 때로는 등산용 가스램프로 환하게 켤 때도 있다. 그러나 가스를 아끼기 위해 꼭 필요할 때에만 사용한다. 그리고 마루방(듣기 좋은 말로 하자면 거실인 셈이다)에는 등유로 호롱불을 밝힌다. 고풍스럽다. 이 불은 취침 전에 끈다.

   조석 예불시간에 불단(佛壇)에는 알루미늄 곽에 든 초를 유리컵 안에다 켠다. 원래 이 초는 차를 식지 않도록 데우는 데 쓰는 티 라이트(tea-light)인데 천장이 낮은 집이라 긴 초를 켤 수 없고, 한 뼘이 채 안된 작은 불상 앞에는 이 초가 어울린다. 이 초를 켜두면 벽면에 비친 불상의 그림자가 실체보다 훨씬 크고 장엄해서, 그림자와 실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림자 없는 실체가 없듯이 실체는 반드시 그 그림자를 동반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따금 맹목이 되어 그림자를 실체로 잘못 아는 경우가 허다하다. 귀신은 그림자가 없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말이다. 내 그림자는 나를 얼마나 닮았는지, 혹은 내 실체가 어떻게 비쳐지는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볼 때가 더러 있다.

   방 한쪽에는 기름등잔을 켠다. 이 기름등잔은 아주 그윽하고 영롱해서 두메산골의 정취를 한결 돋구어준다. 나는 이 기름등잔이 너무 사랑스러워 친지들에게도 켜보라고 권하지만, 그런 운치와 분위기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더라.

   운두가 낮은 직경 두어 치쯤 되는 접시에 식용유를 붓고, 심지로는 면실 세 겹 정도로 꼬아서 가장자리에 걸쳐두고 불을 켜면 된다. 심지가 기름에 떠서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해 조그만 조약돌 같은 것으로 심지를 눌러두고 그 돌을 움직여 심지를 조절하면 좋다.

   몇 해 전 포도주로 이름난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에 갔을 때, 하루는 친구를 따라 대서양 연안으로 나가 망망한 바닷가에서 한나절을 즐겁게 지내다가 온 일이 있다. 물이 빠져 나간 모래톱에서 보석처럼 박혀 있는 예쁜 조약돌을 주워 주머니에 담았었다. 모래톱을 핥는 잔잔한 물결소리를 곁에 두고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를 밟고 다니면서 조약돌을 골라 줍던 무심한 한나절의 풋풋한 기억이, 기름등잔에 놓아둔 조약돌에서 아직도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좌선(坐禪)할 때는 불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간접조명이어야 한다. 백자로 된 사발에 ‘티 라이트’를 켜두면 그 불빛이 오롯하고 푸근해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기에 알맞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인간의 정서를 이루는 데 가장 큰 몫을 하는 것은 빛과 소리라고 여겨진다. 빛이 눈부시면 들뜨기 쉽고 너무 어두우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소리도거세면 신경을 자극해서 곤두서게 하고 너무 낮으면 무기력하게 만든다.

   밤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의 불빛을 우해 여러 가지로 시도를 해보고 나서 가장 알맞고 경제적인 빛을 얻어냈다. 촛불은 흔들리기 때문에 눈이 곧 피로해진다. 한쪽은 백열등이고 다른 한쪽은 형광등인 랜턴을 한동안 사용했는데 건전지의 소모가 너무 심해서 비경제적이다. 등산용 조명기구로 ‘심포니’라는 등이 있는데, 밝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뭣보다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다. 연로는 부탄가스인데 한 통으로 계속해서 네 시간 삼십 분을 켤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불빛을 가려주는 것이 달려 있지 않아 그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눈이 시그럽다. 이모저모를 생각하던 끝에 햇빛 가리개로 차양만 달린 모자를 구해다 써보았다. 등불의 갓을 내 머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한밤중에 혼자서 크게 웃었다.

   지난 섣달 그믐날은 마음먹고 건전지를 사다가 오랜만에 음악을 실컷 들었다. 불교방송을 통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는 정목 스님이 내게 선물한 음악인데, 그날 오두막 둘레에는 눈이 끝없이 내리고 뒷골에서는 노루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로에 장작을 한 아름 지펴놓고 베니아미노 질리의 노래로 ‘시칠리아 마부의 탄식’과 ‘마레기아’를 되풀이 되풀이해서 들었다. 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도록. 질리의 덜 채워진 듯한 그 목청이, 붓글씨로 치면 갈필 맛이 나는 그런 소리가, 저 늦가을 들녘을 스쳐가는 마름 바람결 같은 그의 구슬픈 음색이 가슴에 와 닿았다. 메말라가던 내 가슴에 물기가 촉촉이 베어들었다.

   어제는 서울에서 모임을 마치고 밤늦게 오두막으로 돌아오면서 ‘이 밤중에 뭣 하러 이렇게 기를 쓰고 가지?’ 하고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이유는 없다. 거기 가면 내 자신을 만날 수 있고, 내 자신과 보다 가까이 할 수 있으니까.

   차를 가지고 온 동료들이 ‘강남쪽’ ‘서대문쪽’ 하고 함께 타고 갈 사람을 찾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영동고속도로’하고 외쳤다. 물론 따라올 사람도 없고 따라오게 할 사람도 없지만….
 
1994. 4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