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예불하고 점점 밝아오는 창 앞에 허리를 펴고 마주앉아 있는 이 투명한 시간을 나는 즐기고 싶다.

   차가운 개울물소리에 실려 어김없이 쏙독새가 ‘쏙독 쏙독 쏙독’하고 집 뒤에서 한참을 울어댄다. 달밤이나 새벽에 많이 우는 쏙독새를 일명 머슴새라고도 하는데, 부지런한 이 새의 생태로 봐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윽고 휘파람소리로 4박자로 우는 검은등뻐꾸기와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웅 웅 웅’하고 벙어리뻐꾸기가 새벽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소리는 메말라가며 굳게 닫힌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해준다. 새벽에 일찍 깨어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조촐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간에 거리에는 그 전날 사람들이 어질러놓은 자리를 묵묵히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의 거룩한 움직임이 있다. 또 시장에는 새벽장을 여는 부지런한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있다. 그리고 고속도로에는 밤잠을 자지 않고 밤새워 짐을 나르는 화물차의 행렬이 있다.

   이와 같은 새벽 풍경은 곁에서 바라보기에도 뿌듯하고 든든하다. 활기찬 생명력이 이웃에까지 번져오는 것 같다. 하루가 시작되는 이른 새벽에 깨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전문가들의 체험에 의하면,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이런 시간이 하루 24시간 중에서도 명상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한다. 명상이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묵묵히 쓸고 닦는 그 일이, 시장에서 무심히 사고파는 그 행위가, 또한 맑은 정신으로 차분하게 차를 모는 그 운전이 바로 명상으로 이어진다.

   어떤 직종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된다.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슨 일을 좋아하며,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고, 무엇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고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보면 자기 존재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이런 명상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바깥 소용돌이에 자칫 휘말리게 마련이다.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일이 없으면 우리 마음은 날이 갈수록 사막이 되고 황무지가 되어간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이 총체적인 부정부패로 전락하게 된 것도(물론 가진 사람들의 경우다) 따지고 보면 구조적인 모순으로 돌리기에 앞서, 개개인이 하루 한때라도 자신의 삶을 안으로 살펴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한 데에 그 요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저마다 자기 삶의 몫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지를 한때라도 생각을 가다듬고 살필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밥술이나 먹고 살게 된 오늘에 와서까지 물질지향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대정권에서는 국민총생산량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국민의 총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요즘 정신세계의 흐름을 보면 물질 지향적인데서 벗어나 삶의 질을 문제 삼는 영적인 변혁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같은 생물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일반 동물과는 달리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사간의 갈등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것도 피차가 노동의 대가인 임금만을 문제 삼고 노동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데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근로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 기업이라면, 근로자들에게 지불되는 보수나 휴가에 못지않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 많은 산업재해는 인간을 한낱 도구로 여긴결과 아니겠는가.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노동의 목적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간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형상이 물건에 새겨지기 때문에 노동은 인간의 자기표현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량제품은 그 만들어낸 사람의 삶이 불성실하다는 표현이다.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사용할 사람들의 편의와 처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한다면, 그 제품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가 형성된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자기를 실현하는 구도자일 수도 있다.

   농사철에 맞추어 씨앗을 뿌리고 부지런히 땀 흘려 가꾸는 농부도 자신이 지은 곡식과 채소가 수많은 사람들의 영양과 건강에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다면, 그 농사일이 단순한 생업이 아니고 인간 형성의 길과 하나가 된다.

   나는 요즘 해거름에 맨발로 채소밭에 들어가 김매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벗은 발로 부드러운 밭 흙을 밟으면서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들을 보며 김을 매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느긋하고 편안하다. 흙은 이렇듯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힘의 원천이다.

   어떤 명상가는 말한다.

   “명상은 창문을 열어놓았을 때 들어오는 산들바람이다. 그런데 일부러 창문을 열고 억지로 불러들이려 하면 그 산들바람은 들어오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자신의 삶에 귀를 귀울여보라. ‘나는 누구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라.
 
1993. 6. 20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2015.09.03 (13:52:21)
[레벨:4]사랑이2
 
 
 

너무 좋은 말씀이 가슴에 와닿네요.

자신은 누구 인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

생활에 바쁘다는ㄴ 핑계로

우린 나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가 싶네요.

좋은 오후 시간 되세요~

 
(112.166.55.41)
  
2015.09.03 (15:24:30)
[레벨:29]id: 오작교
 
 
 

사랑이2님

방명록에 남기신 글을 보니깐

예전에 '사랑이'란 닉네임으로 우리 홈에 오셨던

그 분이 아닌가 싶네요.

 

늦게라도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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