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세상이 재미없을 때 우리가 선뜻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저만치 있는 산이다. 산에는 울창한 수목이 자라고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온갖 새와 짐승들이 천연스럽게 뛰놀고 시원한 바람도 가지 끝에서 불어온다. 맑은 햇살과 싱싱한 숲 향기, 그리고 태고의 신비가 파랗다.

   이렇듯 산에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있고, 억지가 없는 우주의 질서가 있다. 또한 이 산 저 산에 그 산의 주인인 수도인이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 시정(市井)에서 닳아지고 얼룩진 마음을 쉬려면 한적한 산을 찾게 된다.

   한 스무날 이 산으로 저 골짜기로 쏘다니면서 줄곧 느낀 것은 예전 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즘의 산들은 형편없이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관광개발이네 국립공원이네 하여 전에 없이 깎이고 허물리면서 어설프게 치장하는 바람에, 우리네 푸른 소나무와 대숲이 호남이고 영남지방이고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병들어 시들고 있었다. ‘송죽(松竹) 같은 절개’란 말이 나올 만큼 꿋꿋하고 청청하던 그 송죽이 시들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말인즉슨 ‘자연 보호’운운하지만, 자연을 보호하려면 본래 있는 그대로를 놔두어야 한다. 그것을 보호한답시고 결과적으로 파괴하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병든 문명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마저 마른바 개발의 깃발이 펄럭거리는 걸 보고 어느 누가 아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긴 안목으로 볼 것도 없이, 관광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허물고 깎는 개발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지키고 가꾸는 일이 긴요하다. 왜냐하면 칠하고 발라놓아 반들반들한 문명에 식상이 되어 길을 떠난 나그네들이기 때문에, 닦이지 ㅇ낳고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품에 안기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이 허물어져가는 산임에도 그 산의 주인인 수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산이 다만 흙더미와 나무와 물의 집합체가 아니고 조화를 이룬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진흙탕 속에서도 물들지 않은 연꽃 같은 청정한 존재들이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취산에는 극락암에 경봉 노사(老師)가 계시고, 가야산에는 백련암에 성철 스님이, 조계산에는 송광사에 구산 스님이 각각 그 산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시정에서 맥을 못 추고 있는 불교와는 달리, 산에는 의젓한 도량(道場)이 형성되어 있다. 이밖에도 눈 푸른 젊음들이 지리산에서 태백산에서 백운산 등지에서 밤잠을 줄이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누구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의 칼(般若劍)로 자신과 이웃의 두터운 무명(無明)을 절단하기 위해서.

   그런 도량에 이를 때마다 나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다움과 푸근한 생각으로 하여 겹친 여독(旅毒)도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사늘 찾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산에는 푸른 젊음이 있어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사람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커다란 조화를 이루면서 끝없는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 그런 산에 돌아가 살고 싶다.
 
<1975 . 6>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