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수많은 말 중에서도 하필이면 새해 인사로 복을 받으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들 삶에서 복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 복이 우리를 받쳐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복이 우리를 받쳐 준 덕분에 오늘 여기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새해 달력을 바꾸어 걸어 놓은 지 어느새 한 달 하고도 아흐레가 되었습니다. 금년 365일 중에서 이미 9분의 1이 지나갔습니다. 세월이 덧없다는 소리를 실감합니다. 지나가는 세월을 두고 옛사람들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다고 했습니다. 번개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이는 찰나처럼 몹시도 짧음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런 표현이 나온 것도 실제로 시간의 덧없음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런 표현을 관념으로만 듣고 그 실체를 절감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대개 시간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지난겨울 눈병을 앓으면서 저는 시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습니다. 병원에서 안약을 처방하면서, 한 가지 약을 한 시간 간격으로 넣으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 한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훌훌 빠져나간다고 표현해야 더 맞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모래를 한 움큼 쥐었을 때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사라져 벼렸습니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간마다 안약을 넣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습니다.

    보통 때는 이렇듯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관념으로만 그 덧없음을 의식했지만, 막상 내 몸으로 부딪쳐 보니 그렇게 재빨리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 앞에 저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남은 시간이 잔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덧없음이 굳이 노년에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고, 그 24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순간순간의 삶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같이 귀중한 시간을 매 순간 어떻게 맞이하며 보내고 있는지 깊이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이와 반대로 우리 자신이 시간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친구를 만나서 서로에게 유익하고 정다운 자리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시간을 살리는 일이 되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남의 흉이나 보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를 가졌다면 그것은 시간을 죽이는 일입니다. 똑같이 주어졌음에도 잘 쓰면 시간을 살리는 게 되고, 무가치하게 흘려보내면 그토록 귀중한 시간도 죽이는 것이 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날 때 시간을 살리고 있는지 죽이고 있는지 안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연쇄살인 사건과 용산참사로 인해 모처럼 맞이한 새해 첫머리가 시작부터 얼룩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끔찍한 뉴스를 되풀이해서 접하다 보면 우리의 일상도 그만큼 얼룩지게 됩니다. 이런 것은 결코 시간을 살리는 일이 못 됩니다. 올 한 해 시간의 덧없음을 화두(話頭)삼아 복된 순간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다 같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사십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보다 알차게 살 수 있도록 정진하십시다.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

    오늘이 맺은 것을 푸는 해제일이라 한 가지 곁들이겠습니다. 평소에 제가 마음에 두고 있던 생각인데, 해젯날이고 해서 풀어 버리려고 합니다. 이곳에 처음 절이 만들어졌을 때는 잘 아시다시피 여러 가지로 어설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간의 여러 불자들이 정성과 주지스님을 비롯한 절을 운영하는 소임자들의 노고 덕에 오늘 같은 번듯한 도량이 되었습니다. 지장전과 식당이 세워지고 설법전과 종각, 정낭(화장실)이 정비되었습니다.

    이 절을 처음 만들고 창건법회 할 때 저는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절이나 교회가 너무 흥청망청하기 때문에 조촐한 절이 되었으면 싶어 가난한 절을 표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봐도 가난한 절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보건대 넘치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끝에 으레 불사를 내세워 돈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때마다 몹시 곤혹스럽습니다. 물론 절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부득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불사의 내용을 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제가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길상사의 경우, 달마다 나오는 소식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얼마든지 불사의 내용을 알릴 수 있습니다. 또 일주문 안에 게시판이 있습니다. 게시판에 실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성한 법회를 논 이야기로 먹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돈 이야기를 꺼내서 신도에게 부담 주지 말라고 하는데, 다른 산 사람은 그럼에도 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니, 둘이서 미리 짜고 하는 수작 같아서 듣는 쪽에서는 부담과 불쾌감을 동시에 지니게 됩니다. 모처럼 절에 와서 그동안 쌓인 짐을 부리고 가려는데, 도리어 짐을 지고 가는 결과가 된다고 하는 불자도 있습니다.

    법회는 이름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법다운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 들은 법문 내용을 차분히 음미하면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법문 끝에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법회와 법문에 대한 일종의 모독입니다. 이런 일은 이 절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절이나 교회 할 것 없이 상식화되고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인습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워서 정말로 못 살겠다는 때 아닙니까?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온 사람들조차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매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일자리를 잃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는 절이나 교회에서 어려움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떵떵거리기나 한다면 절도 교회도 아닙니다. 세상이 나아질 때까지 적어도 이 도량에서만이라도 불사가 중단되어야 합니다.

    절의 종에 금이 갔더라도 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종으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종소리가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종소리에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가, 담겨 있지 않은가에 있습니다. 종을 치는 사람에게 그 종을 통해서 간절히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 염원이 듣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제 나이도 있고 건강도 전만 못해서 이런 자리에 앞으로 자주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그동안 속에 고였던 말을 오늘 쏟아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서운하게 듣지 말고 또 다른 법문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거친 말을 써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2009. 2. 9. 겨울안거 해제)


글출처 : 一期一會(법정스님 법문집)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