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기와집을 까러 왔다는 사나이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난 1월 21일. 그 검은 농구화의 사나이가 한 사람 붙들릴 때, 자기를 겨눈 총부리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사적으로 대해 달라!”

   물론 그는 우리들이 함께 쓰고 있는 모국어로 말했으리라. 절박한 그 순간 그에게는 사상도 주의(主意)도 있을 수 없었다. 오로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태초 생명의 발음이 있었을 뿐이다.

   ‘신사적으로 대해 달라’는 말은 곧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생명의 절규다. 그토록 간절한 절규를 누가 무슨 권리로 감히 꺾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무명의 장난과 비정의 횡포가 살벌하게 깔린 오늘의 비탈길에서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소리였다. 그때 이데올로기는 무너졌을지라도 인간은 승리한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요전번에 하산한 도반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가 하산하여 환속(還俗)한 것은 단순히 세속의 업(業)에 이끌려서만 아니고 새로운 출가의 의지를 가지고 산의 세속에서 뛰쳐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신생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나를 말끄러미 지켜보던 일곱 살짜리 꼬마가 고사리손으로 내 귀를 잡더니 이렇게 소곤거렸다.

   “우리 아빠 데려가지 마! 응.”

   그때 나는 앞이 꽉 막혀버렸다. 너무도 엄숙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곱 살짜리 철없는 어린이의 말이 아니었다. 꾸밈없는 인간의 소리였다.

   역시 도반은 하산을 잘했구나 싶었다. 보살은 대비심(大悲心)으로 근본을 삼는다. 한 중생에게 베풀지 못한 자비가 일체중생에게 미칠 수는 없다. 보살은 또한 중생으로 인해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서 보리심(菩提心-깨달은 마음)을 내고, 보리심은 마침내 정각(正覺-진정한 깨달음.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을 이룬다.

   기계의 소음 속에 인간의 소리가 묻혀버리는 어수선한 노상(路上)에서 구도자의 귀는 어디로 향을 해야 할까.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여음(餘音)만을 한가로이 듣고 있을 것인가. 시장의 소음 속에서 인간의 절규를 가려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소리가 문득 우리들 가슴에 울려올 때 볼모의 대지에 새움이 돋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68. 3. 24.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