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소리
도서명 | 영혼의 母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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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적으로 대해 달라!”
물론 그는 우리들이 함께 쓰고 있는 모국어로 말했으리라. 절박한 그 순간 그에게는 사상도 주의(主意)도 있을 수 없었다. 오로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태초 생명의 발음이 있었을 뿐이다.
‘신사적으로 대해 달라’는 말은 곧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생명의 절규다. 그토록 간절한 절규를 누가 무슨 권리로 감히 꺾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무명의 장난과 비정의 횡포가 살벌하게 깔린 오늘의 비탈길에서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소리였다. 그때 이데올로기는 무너졌을지라도 인간은 승리한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요전번에 하산한 도반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가 하산하여 환속(還俗)한 것은 단순히 세속의 업(業)에 이끌려서만 아니고 새로운 출가의 의지를 가지고 산의 세속에서 뛰쳐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신생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나를 말끄러미 지켜보던 일곱 살짜리 꼬마가 고사리손으로 내 귀를 잡더니 이렇게 소곤거렸다.
“우리 아빠 데려가지 마! 응.”
그때 나는 앞이 꽉 막혀버렸다. 너무도 엄숙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곱 살짜리 철없는 어린이의 말이 아니었다. 꾸밈없는 인간의 소리였다.
역시 도반은 하산을 잘했구나 싶었다. 보살은 대비심(大悲心)으로 근본을 삼는다. 한 중생에게 베풀지 못한 자비가 일체중생에게 미칠 수는 없다. 보살은 또한 중생으로 인해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서 보리심(菩提心-깨달은 마음)을 내고, 보리심은 마침내 정각(正覺-진정한 깨달음.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을 이룬다.
기계의 소음 속에 인간의 소리가 묻혀버리는 어수선한 노상(路上)에서 구도자의 귀는 어디로 향을 해야 할까.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여음(餘音)만을 한가로이 듣고 있을 것인가. 시장의 소음 속에서 인간의 절규를 가려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소리가 문득 우리들 가슴에 울려올 때 볼모의 대지에 새움이 돋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과 몇 번을 마주합니다
부모님이 수도원 지원을 반대하셨을 때, 처음으로 3박4일 가출이란 것을 해봤습니다
가출로 떠난 곳은 계룡산 어느 웅장한 한옥 민박집이었는데
그 때, 번뇌가 참으로 깊었지요
사흘이 지나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소우주 속 희생과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내가 대우주의 사랑을 보듬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간구해 왔던 마음을 접고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대로 수도원으로 떠났더라면
우물 안 개구리 되어 지금 이 순간은 분명코 없슴이라는 것을 잘 알지요
'나를 버리니 우주가 내 안에 있더라'는 말이 가슴에서 메아리 칩니다
허나, 하산한 도반의 하루 하루가 얼마나 버거웠을지...
그 아픔에 목이 메입니다
영적 성장은 늘 그런 것 같아요
내면 의지가 대상과 과감히 맞서 부딪칠 때, 볼모의 대지에서 새움이 돋아나는...
내 삶을 온전히 비워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어야지요
덕분에 나머지 설움도 씻김해 봅니다
글 내려놓으시는 수고로움에 진심 감사드립니다
福 많이 짓는 날들이 되세요
'떠남'을 해보지 못한 저이지만
'떠남'을 선택한 사람을 알고 있어
그 힘든 선택의 결정과 그 과정이 얼마나
고난의 시간들인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우주의 번민을 홀로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었겠지요.
하긴 잠시의 '떠남'도 해보지 못한 입장에서는
그냥 '그런가보다'는 정도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지만요.
어제는 10여 년 간 타던 자동차를 처분했습니다.
그 차가 멀어지는 모습이 아쉬워 물기가 찰랑거리는 정도의
'헤어짐'과 친하지 못합니다.
하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