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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속의 연꽃

오작교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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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영혼의 母音
   지난해 여름, 전람회에 다녀온 한 친구한테서 경복궁 연당(蓮塘)에 연꽃이 피었더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다음 날 아침 부랴부랴 경복궁으로 갔었다. 오로지 연꽃을 보기 위해서. 그것은 황홀했다. 연못에 가득 담긴 청청한 연잎, 그 잎새에서 분홍빛 연꽃이 정결하게 피어 있었다. 바람이 연못을 스칠 때면 은은한 꽃내음이 물바람을 타고 숨결에 스며들었다. 나는 연꽃과 혼교(魂交)라도 할 듯이 해가 기울도록 연못가를 서성거렸였다.

   연꽃은 산꼭대기나 마른 땅에서는 피지 못한다. 하필이면 왜 진흙탕에서만 피는 걸까. 흙탕물 위에 한 송이의 연꽃이 피어날 때 더러운 흙탕은 자취를 감춘다. 더럽다는 분별이 저절로 사라져버린다. 청초한 꽃에 의해 투명하고 맑게 조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연꽃은 자기 몸에 단 한 방울의 흙탕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흐린 곳에 살면서도 항상 조촐한, 이것이 연꽃의 생태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이웃과 함께 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성장함에 따라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생을 영위한다. 그런데 그 관계가 맑고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않고, 때로는 흐리고 냄새나고 추하다는 데에 문제가 따른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부조리로 엮어진 우리가 생활은 사실 시끄럽고 추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나날은 싫건 좋건 간에 우리들의 현장(現場).

   그러니 그 속에서 물들지 않고 청정하게 살기란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평소에는 큰소리 땅땅 치던 사람들이 어떤 상황 앞에 굴절(屈節)하고 마는 것도 예의 흙탕물에 동화되어 버린 탓이다. 그것은 인간의, 아니 인간적인 비애다.

   나의 인생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연소. 따라서 모방과 추종을 떠나 내 나름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뭣보다 먼저 자기 신념의 설정이 있어야 한다. 흐린 곳에 살면서도 물들지 않고 항상 둘레를 환히 비치는 연꽃의 생태, 이것은 한적한 곳에서 안일해지려는 내 일산의 교훈으로 살고 싶다.

1972. 3
글 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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