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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에서

오작교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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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버리고 떠나기
처서(處暑)가 지나면서 아침저녁 바람결이 서늘해지고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예고하고 있다. 이 오두막에 와서 산 지 어느새 다섯 달이 가까워진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개울물처럼 세월도 바삐 바삐 어디론지 흘러간다. 어디 세월뿐이랴.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인생도 잠시도 멈춤 없이 생과 사의 개울을 따라 어디론지 흘러 흘러 간다.

이곳에 와 지내면서 옛사람들의 글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그분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그 감흥은 현대의 우리로서는 미칠 수 없을 만큼 예민하고 뛰어나다.

조선시대의 선승 휴정의 시편들을 들추어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의 인간미와 수행자의 고독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고향에 돌아와(還鄕)>라는 글. /
‘나는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열 살 때 집을 떠났다가 서른다섯에 고향에 돌아오니, 예전의 남쪽 이웃과 북쪽 거리는 모두 밭으로 변해 뽕나무와 보리만 푸르러 봄바람에 흔들거린다. 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허물어진 옛집의 벽에 회포를 써놓고 하룻밤을 자고 산으로 돌아왔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허물어져
마을이 황량하게 변해버렸다.
청산을 말이 없고 봄 하늘 저무는데
두견새 한소리 아득히 들려온다.
한 떼의 동네 아이들
창구멍으로 나그네를 엿보고
백발의 이웃 노인
내 이름을 묻는다
어릴 적 이름 알자
서로 눈물짓나니
푸른 하늘 바다 같고
달은 삼경이어라.’
이 오두막에 와 살면서 마음이 한가할 때면 더러는 먹을 갈아 서투른 붓장난을 한다. 마루방 벽에 휴정 선사의 다음 같은 시를 써서 붙여놓았는데 이 오두막의 경계와 비슷해서 차를 마시면서 눈길을 보낼 때가 있다.
바람은 자도 꽃은 지고
새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
새벽은 흰 구름과 더불어 밝아오고
물은 밝은 달 따라 흘러간다
맑게 흐르는 개울가에 무심히 앉아 있노라면 사는 일이 조금은 허허롭게 묻어올 때가 있다. 한세상이 잠깐인데 부질없는 일에 얽매여 시들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얽매임에서 훨훨 벗어나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할 때, 비로소 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일이 자기 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둘레의 형편 때문에 마지못해 질질 끌려간다면 그것은 온전한 삶일 수 없다. 서로가 창조적인 노력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오고 가며 만나는 사이를 어떻게 친구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다.
  
창조적인 삶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지내건 간에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늘 새로운 시작이 뒤따라야 한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그 무슨 이름을 붙이건 간에 타성의 늪에 갇혀 이내 시들고 만다. 웅덩이에 괸 물은 마침내 썩게 마련. 흐르는 물만이 늘 살아서 만나는 것마다 함께 사는 기능을 한다.
  
꽃은 날마다 새롭게 피어난다. 겉모습은 어제의 그 꽃 같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어제의 것이 아니다. 새로운 빛깔과 향기로써 그날을 활짝 열고 있다. 그러다가 제 몫을 다하고 나면 머뭇머뭇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뚝뚝 무너져 내린다.

  우리가 뜰이나 화분에 꽃을 가꾸는 것은 단순히 그 꽃의 아름다움만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 없는 가운데 삶의 모습과 교훈을 보여주고 있는 그 뜻도 함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개울가에서 나는 몇 가지 허망한 일을 겪었다. 죽음이나 이별 같은 허무가 아니라 일상적인 부딪침에서 오는 조금은 서운하고 어이없는 그런 허망함을 몇 차례 맛보았다.

  한번은 점심 공양 때 밥을 지어놓고 김치를 꺼내러 개울가에 나갔더니 밤새 내린 비로 개울물이 불어 플라스틱 김치통이 어디론지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 며칠 전 서울에서 올 때 법련사 공양주 보살님의 정성껏 담아준 김치인데 두어 번 꺼내 먹고는 그대로 떠내려 보내고 만 것이다. 시지 말라고 차가운 개울물에 담그고 무거운 돌을 눌러두었지만, 개울물이 불어 부력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김치 없는 밥을 먹으면서 짠하디짠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개울가로 빨랫거리를 가지고 빨러 나갔는데 개울가 높은 바위 끝에 놓아둔 빨랫비누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집 안에 갔다 두었나 싶어 되돌아와 있을 만한 데를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뒤미처 생각하니 간밤에 내린 폭우로 불어난 개울물이 비눗갑째 쓸어간 것이다.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를 듣고도 비누를 들여놓지 않은 일이 며칠을 두고 후회되었다.
  
큰 것은 잃어버리고 나서도 곧잘 포기하거나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인데 김치와 비누는 며칠을 두고 개울가에 갈 때마다 허망함이 떠오르곤 했다. 자취하는 사람의 좀스러운 성미인가.
  
서울에서 일을 보고 휴가철 교통체증을 피하려고 새벽같이 떠나 네 시간 남짓 달린 끝에 오두막으로 가는 개울가에 이르니, 징검다리가 불어난 개울물에 잠겨 건너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 이때의 어처구니없는 허망함을 무엇에 견주리. 알아보니, 동해로 빠져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영동지방에는 나흘 동안 많은 비가 내렸다고 했다. 그 무렵 서울은 며칠 동안 매연 한점 없는 개인 가을 하늘이었다.

할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든 일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게 마련이다. 그날 개울을 건널 수 없어 먼 길을 되돌아간 덕에, 한 친구의 꼬인 일을 풀어줄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걸 가리켜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곳에 와 살면서 밤낮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비롯하여, 바람 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내 귀와 영혼은 맑게 트였다. 그러면서도 더러는 사람이 만든 소리, 즉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건전지로 움직이는 휴대용 소리통을 하나 가져왔었다. CD와 카세트테이프 겸용이다.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로 바흐의 첼로 조곡을 요즘 즐겨 듣는다. 한때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를 되풀이해 들은 적도 있다. 이따금 불일(佛日)에 가면 게리 카의 콘트라베이스에 영혼의 샤워를 한다. 하몬 루이스의 파이프 오르간이 배음으로 깔린 이 콘트라베이스 소리에 기대고 있으면 먼 길의 피로도 말끔히 가시고 맑은 바람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 다도해의 한 섬에서 염전 일을 거들며 사는 영미가 보내준 음악인데 기댈 만한 소리이다.

그런데 이런 음악에 기대어 한참 속뜰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음악이 뚝 중단되면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한다. 아, 건전지가 다된 것이다. 이때의 허망함 또한 개울물이 불어 건너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그런 심경과 비슷하다. 건전지 소모가 너무 심해서 충전해서 쓰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이게 예고도 없이 뚝 멈추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도 그 심지가 다하면 어느 날엔 가는 이렇게 뚝 멈추어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마다 든다.
  
개울물 소리에 실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흐르는 물소리는 늘 들어도 싫지 않다. 자연의 소리와 빛 가운데 평안히 있다. 투명한 영혼이 깃들여 있다.
  
다시 가을이 온다!

1992. 7
글 출처 : 버리고 떠나기(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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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Author 2024.08.23. 10:41
잊었었는데, 어제가 바로 처서였네요.
처서.
더위가 간다는 절기이니 이젠 더위도 조금은 기를 꺽을 듯 합니다.

저 만치에서 가을은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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