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글 - 법정스님께서 남기신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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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영혼의 母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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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볼일로 시내에 들어갔다가 극장 앞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장사진을 보고, 시민들은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낮의 뙤약볕 아래 묵묵히 서 있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을 때 측은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먼 길의 나그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피로와 우수의 그림자 같은 걸 읽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남들은 권태로운 영역을 탈출, 녹음이 짙은 산과 출렁이는 물가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을 텐데, 무슨 자력에라도 매달리듯 마냥 같은 공해 지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들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시정의 서민들이 기껏 즐길 수 있는 오락이라는 게 바로 극장에서 돌아가고는 있지만.
우리도 가끔 그런 오락의 혜택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백주의 장사진에 낄 만한 열성은 갖지 못했다. 사실 오락은 그때의 기분과 직결되는 것이라 때와 장소가 문제 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우리 국산 영화 사상 드물게 보는 수작이라고, 그걸 안 보면 한이 되리라는 듯이 하도 보채대는 광고와 영화평에 이끌려 한낮에 을지로 쪽으로 찾아갔었다. 극장에 나오는 길로 약국에 들러 두통약을 사서 먹고도 불쾌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영화 자체도 문제 이하의 것이지만(전문가들은 그 영화에 무슨 상을 내렸다) 그 극장의 분위기가 퀴퀴하게 밀폐된 창고 같아서 30분도 못 되어 골이 아프기 시작했다. 즐기러 갔다가 즐기기는커녕 고통을 당한 것이다. 허물은 물론 광고문에 속은 이쪽에 있었다.
나는 그래서 조조할인을 좋아한다. 그 까닭은 결코 할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조조(早朝)의 그 분위기에 있다. 우선 창구 앞에 늘어설 필요가 없으니 절차가 간단해서 좋다. 줄지어 늘어서서 기다릴 때 오락은 절반쯤 그 폭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 데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안내양의 그 불안하도록 희미한 플래시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이 선택의 좌석이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다. 모처럼 배당받은 좌석 앞에 벽처럼 버티고 앉은 좌고(坐高)가 시야를 가릴 경우 나의 죄 없는 고개는 피해를 입어야 한다. 그러나 조조에는 그런 피해도 없다.
무엇보다도 조조의 매력은 듬성듬성 앉아있는 그 여유 있는 공간에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이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은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색다른 세계에 자신을 투입하여 즐기려는 것인데, 밀집한 일상이 영화관에까지 연장된다면 어떻게 색다른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밀집은 출퇴근 시간의 만원 버스나 다닥다닥 붙은 이웃집 처마 끝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뜩이나 각박한 세정에 듬성듬성 앉을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은 여유가 있어 좋다.
그렇게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이 출렁거리게 된다. 이 아침에 모인 이웃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얹혀사는 사람일까, 혹은 너무 선량하기 때문에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들일까? 아니면 지나는 길에 훌쩍 들른 그런 사람들일까? 다 선량한 사람들만 같다. 누가 잘못해 자기 발등을 좀 밟았기로 그만한 일을 가지고 눈을 흘기거나 시비를 걸 사람은 아닐 것 같다.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막혔던 의사가 술술 풀릴 그런 이웃들 같다.
<25시(時)> 를 보고 나오던 지난해 여름의 조조, 몇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보았을 때 나는 문득 "요한 모리츠!" 하고 그들의 손을 덥석 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남들은 권태로운 영역을 탈출, 녹음이 짙은 산과 출렁이는 물가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을 텐데, 무슨 자력에라도 매달리듯 마냥 같은 공해 지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들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시정의 서민들이 기껏 즐길 수 있는 오락이라는 게 바로 극장에서 돌아가고는 있지만.
우리도 가끔 그런 오락의 혜택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백주의 장사진에 낄 만한 열성은 갖지 못했다. 사실 오락은 그때의 기분과 직결되는 것이라 때와 장소가 문제 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우리 국산 영화 사상 드물게 보는 수작이라고, 그걸 안 보면 한이 되리라는 듯이 하도 보채대는 광고와 영화평에 이끌려 한낮에 을지로 쪽으로 찾아갔었다. 극장에 나오는 길로 약국에 들러 두통약을 사서 먹고도 불쾌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영화 자체도 문제 이하의 것이지만(전문가들은 그 영화에 무슨 상을 내렸다) 그 극장의 분위기가 퀴퀴하게 밀폐된 창고 같아서 30분도 못 되어 골이 아프기 시작했다. 즐기러 갔다가 즐기기는커녕 고통을 당한 것이다. 허물은 물론 광고문에 속은 이쪽에 있었다.
나는 그래서 조조할인을 좋아한다. 그 까닭은 결코 할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조조(早朝)의 그 분위기에 있다. 우선 창구 앞에 늘어설 필요가 없으니 절차가 간단해서 좋다. 줄지어 늘어서서 기다릴 때 오락은 절반쯤 그 폭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 데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안내양의 그 불안하도록 희미한 플래시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이 선택의 좌석이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다. 모처럼 배당받은 좌석 앞에 벽처럼 버티고 앉은 좌고(坐高)가 시야를 가릴 경우 나의 죄 없는 고개는 피해를 입어야 한다. 그러나 조조에는 그런 피해도 없다.
무엇보다도 조조의 매력은 듬성듬성 앉아있는 그 여유 있는 공간에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이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은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색다른 세계에 자신을 투입하여 즐기려는 것인데, 밀집한 일상이 영화관에까지 연장된다면 어떻게 색다른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밀집은 출퇴근 시간의 만원 버스나 다닥다닥 붙은 이웃집 처마 끝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뜩이나 각박한 세정에 듬성듬성 앉을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은 여유가 있어 좋다.
그렇게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이 출렁거리게 된다. 이 아침에 모인 이웃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얹혀사는 사람일까, 혹은 너무 선량하기 때문에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들일까? 아니면 지나는 길에 훌쩍 들른 그런 사람들일까? 다 선량한 사람들만 같다. 누가 잘못해 자기 발등을 좀 밟았기로 그만한 일을 가지고 눈을 흘기거나 시비를 걸 사람은 아닐 것 같다.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막혔던 의사가 술술 풀릴 그런 이웃들 같다.
<25시(時)> 를 보고 나오던 지난해 여름의 조조, 몇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보았을 때 나는 문득 "요한 모리츠!" 하고 그들의 손을 덥석 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970. 10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