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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오작교 2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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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신 지 어언 3년. 나는 아직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휴대폰의 시진첩을 뒤지다가 우연히 어머니와 찍은 사진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놀란 듯 얼른 화면을 바꾼다.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리움에 빠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몰고 올 슬픔이 싫은 것이다. 빠지는 순간 슬픔이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아직 내게 있다. 

 

  슬픔을 모르는 척하며 지나가는 법을 터득한 것도 어머니 덕분이다. 온종일 벽만 보고 누워 있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선 슬픔 같은 것에 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슬픔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슬픔을 외면하며 지나가야 한다. 낯선 사람 만난 듯 외면하며 딴전을 부리거나 시치미를 떼야 한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세상 떠나야 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멎는 것 같다.

 

  깊은 밤, 느닷없이 일어난 누이가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고 속옷을 갈아 입힌 뒤 침대에 다시 눕히는 순간 어머니는 숨을 멈추었다. 누이의 비명에 놀라 코끝에 손을 대자 들어가는 호흡도 나오는 호흡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라고 크게 부를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말 못 하신 지 오래였으니 대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옷 입히는 동안 이승에 있던 영혼은 그렇게 침대에 누이는 사이 먼 길을 떠나신 것이다.

 

  눈동자만으로 의사표시를 했던 그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마감하며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에게 침묵으로 이별을 고했다. 체온이 발끝부터 서서히 빠져나가 마침내 이마가 차가워질 때까지 우리는 기도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새벽은 서늘했고, 온기가 빠진 어머니 몸 또한 서늘해졌다. 미리 다 흘려서 그런 건지 눈물은 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자유를 얻으셨을 거라는 안도의 마음과 함께 고통스러운 여정이 마감되었다는 홀가분함 같은 것이 찾아왔다. 혹독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생과 사가 지척 간에 있다고 하지만 누가 그 파란만장한 투병의 세월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메르스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5인실이던 병실의 모든 침대가 비워지고 마침내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집에 가고 싶다"라고 조그맣게 속삭이던 어머니의 슬픈 목소리가 오랫동안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집에 가고 싶다! 너무나 당연한 소망 아닌가. 내 집에 내가 가고 싶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대답을 망설이는 스스로를 지켜봐야 했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투병 생활을 한 집이었다. 돌아가면 다시 감당해야 할 힘든 일들이 발목을 잡았다. 간병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누이를 떠올리면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어머니가 가신 뒤 결국 병을 얻었을 정도로 지치고 지쳤으니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돌아오셨고, 모시고 온 지 3년 만에 이제 영원한 집으로 떠나셨다. 

 

 

  슬픔은 기쁨보다 힘이 세다. 슬픔은 강한 자도 약하게 만든다. 슬픔은 그저 못 본 척 딴청 부리며 피하는 게 좋다. 피하고 싶은 이야기이지만 어머니 이야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림 이야기다. 글을 쓰며 살던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온종일 벽만 보고 누워 있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벽에 입을 하나 그려 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차츰 말을 잃어갔지만 그래도 겨우 몇 마디 짧은 말을 하실 수 있던 때였다. 얼마나 고독하셨으면 입을 그려 달라 했을까. 날아와 과녁을 맞히는 화살처럼 어머니의 외로움이 내 가슴에 꽃혔다. 

 

 

  그 길로 나는 입을 그렸다.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다. 일러스트를 배우는 지인 따라 백화점 문화 강좌에 몇 번 간 것이 학습으로는 전부였던, 배운 바 없는 그림이다. 한 달 과정의 백화점 강좌를 몇 번 나가고 그만둔 건 함께 가던 지인이 수강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에 홀린 듯 나는 그림에 빠져들었고, 몇 개월 뒤 뭔가에 떠 밀린 듯 연 전시회는 뜻밖의 성황을 이루었다. 전시한 그림은 다 팔려 나갔고, 화가라는 어색한 명칭이 이름 앞에 붙었다. 정말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도록 그리기에 몰두하다 시간이 되면 깜짝 놀라 어머니 계신 집으로 달려가던 때의 일이다. 

 

 

   입을 그려 보여드리자 어머니는 일그러진 얼굴(파킨슨 병은 모든 것이 서서히 굳어지며 얼굴 모습까지 바뀐다)에 웃음을 띠며 좋아하셨다. 입을 그리긴 했지만 사람의 입은 아니었다. 사람 입 대신 어미 새를 향해 입 벌리는 아기 새들의 부리를 그린 것이다. 어설픈 그림이지만, 슬픔과 절망의 병상에 새들의 부리는 잠시 웃음을 안겨주었다. 

 

  재미있어 하는 어머니를 위해 그날부터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연 것이다. 그러나 병이 진행되며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못할 지경이 되자 그림 보여드리는 일을 중단했다. 마지막 의사소통 수단은 눈동자였다. 눈을 깜빡거려 대화를 하며 어머니와 나는 돌아가신 뒤 장례는 어떻게 치를 것이며, 유골을 어디다 뿌릴 것인지 등 사후 문제를 의논했다. 의논이 아니라 일방적인 설명이었지만, 동의하면 눈을 깜빡거리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눈동자로 응답했다. 

 

 

미안하다 아들아, 오래 누워 있어서.

얼른 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바깥엔 몇 번이나 계절이 지나가고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어머니는 

입술을 움직인다.

 

봄이 와도 미안하구나, 가을이 와도 미안하구나

계절 바뀌는 것도 송구하다며

안 가고 오래 살아 죄인 같다며

떨지는 꽃잎처럼 물기 다 빠진 

입술 달싹거려 사죄한다.

 

                          김재진<미안하다> 중에서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감정 표현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한다는 말은 못 했지만 구부러져 불편한 손으로도 어머니는 문병 온 사람에게 손 들어 인사를 했다. 겨우 손목을 세워 흔드는 듯 마는 듯 하는 인사였지만. 그건 이번 생에선 다시 못 볼 지인들을 향한 작별의 말 같은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죔죔 하듯 쪼그라져 볼품없는 손으로 하는 그 인사는 보는 이의 마음속에 꽃 한 송이 씩을 피웠다.

 

  꽃이 별것이겠는가? 꽃은 나무가 피워 올린 탄식 같은 것이다. 수많은 탄식이 쌓여 산을 이루고, 그 산을 등에 진 채 우리는 한세상을 넘는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오므렸다가 피는 어머니의 그 손을 우리는 연꽃 손이라 불렀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연 잎을 떠올리게 하는 그 인사를 우리는 연꽃 인사라고 불렀다. 연꽃은 지고 계절은 가을로 넘어갔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가을날 새벽, 어머니의 연꽃 인사는 낙엽과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꽃은 지고 나면 다음 해에 또 피지만, 사람은 가고 나면 돌아올 줄 모른다. 어머니께 하지 못한 한마디는 오래오래 내 가슴속에 후회로 남아 있다. "사랑한다"는 말 한번 하지 못한 시간을 돌아보며 손가락 움직여 나는 허공에 '엄마'라고 써본다. 아무도 없는 허공 위로 "사랑해요"하고 불러본다. 사람이 떠난 자리엔 후회만 남는 범. 아끼지 않아도 되는 말을 아꼈다는 자책으로 나는 어둠 속에 탄식 하나 토해 놓는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언제라도 사랑한다는 말은 늦지가 않다.

 

글 출처 : 사랑하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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