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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희망보다 허심탄회한 포기가 빛나는 순간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 말

오작교 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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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포기. 그것은 ‘예전의 아버지, 건강하고 멋진 아버지’를 다시 찾으려는 희망이다. 사실 나는 어머니보다도 아버지와 더 친한 딸이었다. 우리 둘은 통하는 게 많았다. 아버지는 책을 좋아했고, 학자로 살고 싶어 했지만,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그 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우리 세 딸을 세상 무엇 보다 아꼈다.

   그토록 다정했던 아버지가 10여 년째 뇌경색을 앓고 있고, 성격도 가치관도 돌변해버렸다. 병이란 게 정말 무서운 것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과 성격까지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예전처럼 타인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건강에만 관심이 있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좀처럼 눈치채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당황스럽다. 다정하고 사려 깊고 친절한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저토록 낯선 노인이 우리 집 안방에 앉아 있는 것일까.

   너무 기가 막힌 한참 동안 망연자실한 적도 있다. 길에서 아버지의 옛 모습을 닮은 노인을 만나면, ‘혹시 잃어버린 우리 아버지가 아닐까’ 싶어 나도 모르게 쫓아가다 가슴이 미어진 적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힘들게 살아가지만 자애롭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면 꼭 잃어버린 나의 아버지 같아 느닷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예전으로 돌아올까, 돌아오지 못할까’를 걱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예전의 아버지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을 포기했기에, 아직 낯설고 가끔은 섭섭한 아버지의 모습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 아직은 아버지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너무 많이 걱정하는 것도, 너무 많이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당사자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조심해라’라는 어머니의 조언이 때로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항상 조심만 하다가는 조언이 때로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항상 조심만 하다가는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없으니까. 항상 걱정만 하다가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없으니까. 부모임이 살아계신 오늘, 걷고 말하고 볼 수 있는 오늘을 사랑하고 즐기자.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라는 절망적인 물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걱정의 범위를 좁히고, 기대의 범위를 좁히자. 대신 살아 있는 오늘, 아직 사랑할 기회, 아직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축복에 감사하자.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 나니 인생은 더 크고 넓고 다정해졌다. 눈부신 희망보다는 허심탄회한 포기가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아주 가끔은 포기가 희망보다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철들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때 진정한 만족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것들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 때문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그것이 정말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를.

   ‘자유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그것이 우리의 남은 삶을 결정할 것이다.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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