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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동물에 기대어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오작교 3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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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혀 새 한 마리 추락했다. 떨어진 새에게 물을 먹이고 조심스레 풀숲에 놓아준다. 정신 바짝 차리고 다니지, 녀석도 참…….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새가 어찌 젊은 날의 내 모습 같다.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지진 않았지만 뒤돌아서다 기둥에 얼굴을 박아 안경이 깨지거나, 어두운 밤 전봇대에 받혀 나가자빠진 적은 많다. 고등학교 시절엔 학교를 빼먹고 뒷산이나 공원 같은 곳을 찾아가 비 내리는 풍경을 쳐다보며 앉아 있기 예사였다. 재수 좋은 날은 공원에서 똑같이 학교를 빼먹은 친구를 만나 수업 대신 개똥철학을 주고받다가 학교에 갔다 온 양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학교 간다며 골목을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어머니는 나 몰래 지켜보시곤 했는데, 골목 끝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학교이고, 왼쪽으로 가면 딴 길로 새는 것이라는 말씀을 뒷날 우스개처럼 하셨다. 나중엔 친구 중 하나가 아침마다 찾아와서 학교로 데려갔다.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 사는 절친이 그 친구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대신 친구 따라 일산에 와서 25년째 살고 있다. 학교를 빼먹고 산에서 자다가 몇 번이나 안경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벗어놓은 안경을 그대로 둔 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피해 잠자리를 옮긴 탓이다. 전봇대에 처박혔던 것은 정신을 차리지 않고 다녀서가 아니다. 어느 한 곳에 꽂히면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며 다른 것을 살피지 않은 탓이다.

   화분에서 자라는 꽃양귀비에 물을 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목마른 꽃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물 좀 주세요.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던 나를 꽃은 소맷자락 붙잡듯 불러 세운다. 비가 내리지 않은 지 제법 되었다. 백두산에서 만난 두메양귀비를 생각하며 나는 무릎을 꿇고 화분에 물을 준다. 화분에 핀 키 큰 양귀비보다 키 작은 두메양귀비 앞에선 무릎 꿇으며 겸손해진다. 별 보러 놀러 간 몽골의 초원에서 두메양귀비와 재회한 적이 있다.

   백두산에서 만났던 두메양귀비를 몽골의 초원에서 또 만난다. 살아 있었구나! 너 포연(砲煙) 속에 해후한 옛 친구 손을 잡듯 엎드려 나는 꽃을 본다. 황폐한 초원에서 내 무릎 꿇게 하는 낮디낮은 이 꽃은 눈물이다. 천상의 별들이 떨어트려 놓은 너무 맑아 다칠 것만 같은 눈물 짧게 꽃 피우곤 사라지고 마는 사람도 알고 보면 눈물이다. 깊게 팬 주름살 고랑처럼 흐르며 소금기 남겨둔 채 사라져가는 눈물도 알고 보면 다 꽃이다. - 김재진 <두메양귀비>

   물을 준 뒤 라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부터 모든 것의 볼륨이 높아지고 있다. 때로는 전화 저쪽 상대방이 왜 소리를 지르느냐고 볼멘소리하기도 한다. 두 귀가 들리는 사람은 한쪽 귀의 애환을 모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을 모르는 법이다. FM에서 흘러나오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듣다가 평소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던 뮤지션 한 사람을 떠 올린다. 어디에도 무릎 꿇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하기야 무릎 꿇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가 누구를 존경한다는 것은 남자 어른을 싫어하는 그에게 싫어하지 않는 남자 어른이 생겼다는 말이다. 권위적이거나 폭력적인 아버지를 겪은 사람 중에 커서도 남자 어른을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 유년기의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먹뿐 아니라, 말로 하는 폭력도 두고두고 상처로 남는다.

   인간의 언어는 폭력적인 것이 많다. 비폭력 대화를 가르치는 NVC(Nonviolent Communication)에선 자칼의 언어를 쓰지 말고 기린의 언어로 말하라고 가르친다. 오래전 한국 비폭력 대화센터를 이끌어가는 분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들로부터 들은 말 중 인상적인 것이 ‘기린의 언어와 자칼의 언어’이다. NVC에서 말하는 비폭력 대화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평가하지 않고 관찰하기이다. 가령 “거기는 시끄러워 살 수가 없는 곳이다”라고 하지 말고 “거기는 소음이 있는 곳이다”라는 식으로 평가를 섞지 않고 말하는 것이 첫 번째 원칙에 따르는 대화법이다. 평가엔 말하는 이의 주관적 판단이 섞여 있어 상대 입장에서 보면 기림의 아닌 자칼의 언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마셜 로젠버그의 책 《비폭력 대화》를 읽은 뒤 내가 쓰는 언어를 돌아보며 나 또한 기린보다 자칼일 때가 많았음을 반성한다. 간디의 아힘사(ahimsã)를 연상케 하는 비폭력 대화와 달리 어린 시절, 부모에게 언어폭력을 겪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폭력적 인간의 언어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엔니오 모리코네를 존경하는 그 뮤지션의 노래엔 언어가 없다. 노래에 가사가 없다는 말이다. 마치 허밍이나 모음만으로 하는 보칼리즈같이 그가 부르는 노래는 바람 소리나 자연의 소리를 닮았다. 가사 없는 그의 노래가 한국보다 유럽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에선 반응이 미미한 노래가 놀랍게도 유럽 쪽 SNS에선 100만 넘는 조회 수를 올리고 있으니 이런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부분의 노래는 가사의 도움을 받아 그 내용을 머리로도 이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마치 비폭력 대회에서 평가와 관찰을 분리해 관찰한 것만 말로 표현하는 것처럼 그의 음악은 이해와 느낌을 노래에서 분리해 오로지 느낌만을 표현하고 있다. 노랫말을 생략함으로써 그는 머리를 건너뛰어 가슴에 바로 가닿도록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아마도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가는 사회에서 이런 그의 노래가 반응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수치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회에선 가슴으로 느끼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다.

   FM의 음악은 이제 엔니오 모리코네에서 쇼팽으로 바뀌었다. 영화음악에서 피아노곡으로 바뀐 것이다. 가톨릭의 성인 프란체스코는 나무와 이야기하고, 풀이나 꽃과 이야기하고, 강이나 물고기와 이야기하고, 돌이나 바위와도 대화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성 프란체스코처럼 미친 사람에 의해 지탱된다. 입신 영달과 부귀영화를 성공으로 여기는 소유 지향적 사회에선 편도나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뭇잎과 바람의 노래를 듣고, 풀꽃과 웃고, 돌과 친구가 되는 미친 듯 보이는 사람들이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이다. 풍랑을 일으키고 해일을 일으키면서도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덩달아 육식동물도 멸종하듯 미친 이들이 사라지면 풀도, 나무도, 꽃도 사라질 것이다. 수십억 년의 역사를 지닌 지구에선 여섯 번이나 생명체가 멸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으로 병들어 있는 지구는 지금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다. 지구온난화가 원인이라는 등 인간의 개발 욕망이 원인이라는 등 말이 많지만, 원인도 찾기 전에 인류는 다시 한번 멸종을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이 힘들수록 구세주가 기다려지는 법이다. 소유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성자가 그립다. 양귀비꽃과 대화하고, 메뚜기나 여치와 소통할 수 있는 미친 사람이 그립다.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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