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사랑 없이, 평화롭고 지루하게 / 저녁에 당신에게

오작교 2295

0
   모처럼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급여와 상반기 성과급을 받는 날, 텅 빈 통장에 여러 자리 숫자가 찍히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선물을 하기로 했죠.

   선물이라고 해봐야 서점에서 일고 싶은 책을 몇 권 사는 것이었지만 달달한 연애소설도 사고, 좋아하는 작가의 여행기도 사고, 일기장도 새로 사서 돌아오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던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책장에 새 책을 꽂아 놓고, 책 사이에 새로 사 온 일기장도 꽂아 두면서 그 자리에 있던 오래된 일기장은 빼냈습니다.

   오래된 일기장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으려다가 이 일기장의 첫 장에는 어떤 것을 써놓았었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펼쳐 본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언제라도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서 내 방을 매일 정돈하게 하고, 
세상의 여러 곳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며,
누구에게든 화사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활자 속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당신에게로 갈 불행을
기꺼이 내가 다 막겠다고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그를 열렬히 사랑하기 시작하던 때 쓴 일기였습니다.

   그때는 그랬었구나! 사랑이 지나간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서먹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그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글을 다 썼을까? 마치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그녀는 옛 일기장을 바라보고 있었죠.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지겹도록 사랑했던 시절을 지나온 그녀에게 자주 생각나던 가사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옛 일기장을 서랍 깊은 곳에 넣으면서, 이런 시절이 언제 다시 올까, 노인 같은 심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평화를 포기했던 시절도 좋았지만
사랑 없이 평화롭고 지루한 요즘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새 일기장에 설레는 마음을 적는 날도 오겠죠.
만년필을 꾹꾹 눌러서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새기는 날도 오겠지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글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
공유
0
댓글 등록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이 공간을 열면서...... 10 오작교 09.08.06.10:52 77103
482
normal
오작교 24.02.06.21:17 2864
481
normal
오작교 24.02.06.21:09 2856
480
normal
오작교 24.01.09.21:21 2984
479
normal
오작교 23.12.16.18:46 3023
478
normal
오작교 23.12.16.18:38 3045
477
normal
오작교 23.12.12.13:53 2917
476
normal
오작교 23.10.10.10:27 3080
475
normal
오작교 23.10.10.10:21 3848
474
normal
오작교 23.10.10.10:13 2639
473
file
오작교 23.09.04.11:21 2627
472
normal
오작교 23.08.16.10:01 2759
471
normal
오작교 23.08.16.09:27 2917
470
normal
오작교 23.08.16.09:14 2747
469
normal
오작교 23.08.11.10:31 3033
468
normal
오작교 23.08.11.10:25 2721
467
normal
오작교 23.07.22.11:37 2746
466
normal
오작교 23.06.28.10:12 2434
465
normal
오작교 23.06.22.13:56 2411
464
normal
오작교 23.06.22.11:38 2379
463
normal
오작교 23.06.20.10:04 2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