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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당 추억 / 아버지의 뒷모습

오작교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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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을 들고 두 손과 발아래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바라보았다. 흐느적거리며 군복 가랑이에 두 발은 끼웠으나. 군화 줄을 잡아당기기조차 버거웠다. 까마득한 벼랑을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다. 애당초 용굴 속에서 벌거벗은 상태로 위도까지 헤엄쳐 간다고 나선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벼랑 암벽에 둥지를 틀고 푸드덕거리던 산비둘기조차 오수에 들어간 시간이었다. 1시간 이상 바닷가에서 사투를 벌이다 올라온 분대장에게 "근무 중 이상 무"라는 구령이 없던 병사도 경계호에서 철모를 쓴 상태로 꾸벅거리고 있었다. 축 처진 나를 유일하게 반겨준 잡종 경비건만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왔다.

   수성 할머니가 풍어를 기원하며 빌었다는 수성당은 변산 팔경 중에서도 빼어난 경승지였다. 수성당 초소로 불리던 장소는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무당들의 제기가 자리 잡았다. 수성당 절벽에서 바라보는 채석강과 닭이봉, 용굴과 적벽강 주변의 달빛에 아롱지는 물결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신비스러운 절경이었다. 반년 남은 군대 생활에 새로운 추억을 남기기 위한 계획은 당초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다만 용기를 내서 남자들만 탄 어선에 올라 수성당과 적벽강 절경을 구경해 볼 심산으로 감행했었다.

   점심을 먹은 나른한 오후에 후박나무가 늘어선 죽막동 해안에서 전어 떼는 물 반. 고기 반 뛰어놀았다. 간만의 차가 정체된 시기였다. 벼랑의 용굴로 내려가 용굴 가운데 우뚝 선 바위 아래 넓적한 돌 위에서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군화 위에 군복을 개서 올리고 옥양목 팬티까지 모두 올려놓았다. 폐장한 채석강 해수욕장에서 듬성듬성 군부대가 있던 수성당까지 걸어 찾아오는 관광객은 없었다. 용굴 앞바다는 나 혼자 즐기는 풀장 같았다. 바닷물을 가슴에 적시자마자 첨병 뛰어들자 흐르던 땀이 씻기며 상쾌하였다.

   정식으로 수영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고향 뒤 바다 고양이뿔 해수욕장에서 자연스레 체득한 개구리헤엄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경계 초소에서 내려다보던 농어 낚싯배와 살키미마을 어선들이 드나들던 해로가 바로 눈앞이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마을 배를 만나면 올라타서 돌아올 심산이었다. 한참 동안 열심히 헤엄쳐 나가다가 수면에 잠긴 아랫배로 한기를 느꼈다. 배가 다니는 항로를 지나가던 때였다. 학창 시절 저수지에서 멱 감던 때 느끼던 오싹한 한기에 머리털이 곧추섰다. 정신을 차리고 해면에서 눈높이로 바라본 위도는 까마득한 거리 그대로였다. 곧장 반듯하게 용굴에서 직선으로 헤엄쳐 왔는데, 적벽강 쪽이 아닌 채석강과 적벽강 사이로 흘러든 것이었다. 채석강과 수성당 초소도 물속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풍경화같이 보이는 거리였다.

   수심 깊이나 확인하고 되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모든 숨을 한껏 마신 다음 두 손을 모아 하늘을 질렸다. 10초 20초 30초쯤 내려가면서 조금씩 숨을 내뱉었으나 수압으로 인하여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오는데 발끝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양팔과 다리로 물을 힘껏 찼다. 깊은 물 속 수압으로 가슴이 터질 듯한 압박을 가까스로 견디며 밝은 빛을 느끼고도 한참 만에 수면으로 솟아오르며, 나도 모르게 '휘유'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나는 이유를 알았다.

   해녀를 생각하다가 라디오 뉴스로 들었던 인근 해역, 연도에서 물질하던 해녀 세 명이 백상아리에 공격당했다던 끔찍한 뉴스가 떠 올랐다. 금방이라도 심해의 상어가 다가올 듯 두려워졌다. 개구리헤엄에 물살에 흔들리는 내 중요 부분을 고기로 알고 상어가 물어뜯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싹해졌다. 장가도 안 간 총각인데 상어 미끼로 물어뜯기는 불상사를 피하려고 배영 자세로 바꿨다. 그 많던 갈매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던 바다 위로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던 하늘도 바다 같았다. 휴식을 취하듯 느긋하게 한동안 연안을 향하여 양팔을 저어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물의 온도가 다시 변하였고 파도와 파랑 일면서 출렁거리던 만물이 눈에 들어와 몸을 돌렸다. 해안 가까이 도착한 줄 알았던 방향은 조류 따라 남쪽으로 출발지와 더 멀어진 망망대해였다. 두려워진 순간 쭈글쭈글해진 손바닥을 보았다. 높아진 파랑을 보면서 들물임을 알았다. 힘이 빠지면서 흔하게 표류하던 둥그런 유리병이나 나무토막. 스티로폼을 찾아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따라 지나가는 배도 없었다. 족히 1킬로 이상의 해상에서 할 수 없이 개구리헤엄으로 어기적거리며 입수했던 용굴을 향해 나아갔다. 힘겹게 도착한 용굴 입구의 밟고 뛰어든 바위가 이미 물속으로 사라졌고 밀물 파도가 암벽에 부딪히면서 되돌아 나온 물살만 소용돌이 속에서 거품이 돌고 있었다.

   그곳으로 나아가려다 밀려온 파도에 휩쓸려 되돌아 나오는 아찔한 상황에 겁이 났다. 암벽을 통해 접안하려 해도 파도에 휩쓸려 다시 바다로 내동댕이쳐졌다. 휩쓸릴 때마다 손과 발이 따가웠다. 용굴 입구를 바라보며 회오리 같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도저히 접근할 수 없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돌오돌 떨렸다. 접안도 힘들었지만, 바다로 되돌아 나간다고 하더라도 안전한 채석강 해수욕장까지 2킬로 넘는 거리를 헤엄쳐 나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여러 차례 접안에 실패하면서 따개비와 굴 껍데기에 베인 손바닥 상처가 쓰리고 아렸다.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이판사판으로 큰 파도에 의지하여 접안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밀려오던 큰 파도를 골라 시도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용굴로 기어 나온 것이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문우(文友)는 바다가 보고 싶다며. 격포에서 한턱낸다고 했다. 나는 습관처럼 변산반도 둘레길에 올라 방앗간을 찾는 집 새처럼 수성당으로 향했다. 겨울 바다는 지나간 사연을 숨기고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성큼성큼 뛰어가면 바로 닿을 듯한 하섬. 석도. 소당도. 위도가 눈앞에 다가왔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라도 썰물과 대조기 때는 바람을 몰고 와 바닥을 드러내며 울부짖기도 한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온 변산반도에 꽈리처럼 자리한 송포. 고사포. 격포. 왕포. 줄포와 후박나무 군락지 위의 수성당 용굴을 쪽을 가리켰다. "당 초소는 705 지방도로 전주에서 80km BQ705461 지점에 위치합니다. 좌측 12km 지점에 형제섬이 있습니다. 전방에 위도, 우측 보이는 섬은 소당도와 석도입니다." 제대 말년, 수성당 옆에 지하 콘크리트 수성당 초소 분대장 시절 브리핑 서두이다.

   변산 팔경 중 으뜸은 격포 채석강과 적벽강 사이 용굴 옆 해안 돌출부 암벽에 자리 잡은 수성당이다. 수성당은 풍어와 사고를 막는 수성 할머니를 기리는 작은 사당이다. 수성당 옆으로 후박나무 군락지와 죽막마을과 살퀴미마을은 수산 치어 양식장과 대명콘도가 들어섰다.

   해안선 따라 구축했던 경계호와 순찰로 인근에 살던 20여 호 주민과 마을 전경이 떠오른다. 채석강 절경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해안으로 돌출된 적벽강과 수성당 진입로에는 예전에 없던 숙박시설이 들어섰다. 썰물에 드러나는 바닷가를 용굴을 통해서 후박나무 군락지까지 되돌아 다녔었다. 연안에서 잡아 온 돌게와 해삼, 소라가 널려 있던 때였다. 후임이었던 전우들도 60세가 되었으니. 38년 전 늦여름이었다. 광복절이 지나면 해수욕장은 폐장되었다. 적막한 초소 옆에서 주인 없던 드럼을 두드려 보아도 한낮은 늘 외로웠다. 눈앞에 나타난 임수도와 위도가 무료했던 나를 유혹하던 그때가 그리웠다.

   점심을 마치고 새만금 방조제 따라 새로 생긴 장자교를 차량으로 건너갔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한 여행이었다. 헬기와 배를 타야 볼 수 있었던 선유도도 육지가 되었다.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추억이 빈 하나 남았다.

글출처 : 아버지의 뒷모습(이준구 수필집, 수필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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