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승의 부재가 참 서럽다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나는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찾아가는 친구가 부러웠다. 강산이 한 번 바뀌었는데도 꾸준히 은사님을 뵈러 가는 사람은 선생님과 어떤 교감으로 시간을 쌓았던 걸까. 그러고 보면 선생님이 아끼는 학생은 늘 따로 있었다. 그것을 질투했던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불리는 일은 내겐 혼나거나 그저 그런 이유가 다였기에 항상 멀찍이서 그들의 우정을 방관하곤 했다.
고2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가면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당차게 말하던 그 꿈은 이루었냐고 물어봐 주실까? 모르겠다. 나는 그런 것과 줄곤 거리가 멀었기에 아무것도 가능할 수 없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것저것 조언받는 친구가 참 신기했다. 사실 필요하나 싶었다. 친구와 똘똘 뭉쳐 과제를 헤쳐 나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언제까지나 무색무취였던 나에겐 애정과 존경을 주고받는 사제지간 따위는 없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선배가 있는 사람, 궂은 고생은 하지 않게끔 자신이 닦아놓은 길을 알려주는 스승. 나는 그들의 교류를 목격하며 어딘가 서글펐나 보다. 갈피를 못 잡고 불필요한 실수를 하는 내게 매를 드는 선생이 있었으면 했나 보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기를 바랐던 나인데 왜 이제 와서 툴툴거리는 걸까. 눈 안에 총기가 가득했던 그때, 내가 먼저 다가갔어도 괜찮았을 텐데, 왜 모든 탓을 그들에게 돌리는 걸까. 이 또한 투정임을 안다. 나는 스승이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정말 외로웠다. 학창 시절에 춤만 추고 놀러 다니기 바빴던 애가 감성 에세이를 쓴다니. 친구들은 삼류 작가라는 둥, 억지스러워서 구역질이 나온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썼다. 원래 좋아하는 것에 정신을 잃으면 남의 시선 따위는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욕을 먹어도 쓰고 용케도 그걸 인터넷에 올린 나는 예술가가 된 것처럼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외로웠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 그땐 한 명에 대해 감사함보단 9명의 미움이 더 켰으니까.
어딘가에 작가 선생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그 선생이 이 길이 험난해도 너는 결국 사랑받을 거라고 내게 말해줬으면 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SNS를 시작했다. 그곳엔 나보다 몇 년은 앞서 활동하던 멋진 작가들이 있었다. 나는 자신만의 감성으로 부지런하게 독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그들을 동경했다. 무엇보다 "오늘도 위로받고 가요."라는 댓글을 남겨주는 독자가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내 이야기가 위로되길 바랐다. 그래서 묵묵하게 썼다. 엉덩이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마음으로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주 오랫동안 진득하게 썼다.
20대 초에는 등단을 목표로 소설을 썼다. 필요한 모든 것을 작은 명품 가방에서 꺼내는 한 여자의 이야기. 치열한 삼각관계에서 진짜 사랑을 깨닫는 남자의 이야기, 사후 세계에서 자신의 장례식장을 바라보는 주인공 등 매일 소설을 읽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제 나름 세계관을 만들기도 했다. 300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썼을 덴 어딘가에 흘린 듯 살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이토록 즐겁다니!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고 천장을 보며 다음 장면을 구상하고 일어나면 연필부터 쥐기 바빴다.
많은 작가 중 에쿠니 가오리를 가장 좋아했다. 나는 소소하고 낭만적인 문체를 가진 그녀의 모든 글을 애중했다. 언젠가 에쿠니 가오리 글을 쓰고 싶어 시중에 나온 소설을 모조리 읽고 필사하며 남몰래 그녀를 흠모했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으면 외롭지 않다고 했던가. 고독했던 나는 아무런 보상 심리 없이 쓰고 또 썼다. 그게 돈이 되냐는 말을 들어도, 안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죽었다’라는 전자책으로 시작해 장편소설 그리고 3권의 에세이집까지. 시간이 지나 동경하던 그 자리에 서서 이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됐다. 한번은 어느 독자에게 이런 DM이 왔다.
-작가님 문체는 뭔가 에쿠니 가오리 같아요.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그 독자를 아직 잊지 못한다. 그 한마디로 외로웠던 과거를 보상받는 듯했다. 한동안 미소를 머금고 살았다. 그러나 변함없이 마음 한구석은 공허하다 못해 빈 우주에 놓인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나에겐 스승이 없다. 나에게 이 길로 가라, 저런 선택을 하라는 어른은 없었다. 부모님은 늘 나를 존중해 주었으니 그걸로 감사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서 뚝심 하나만 가지고 개미처럼 썼던 내가 자랑스럽다. 자존심이 센 걸까? 아니면 돈 욕심이 없어서인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작가 세계를 벗어나기 싫었던 건 내가 다 이기고 사랑받고 또 받아 마음이 풍만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길 바랐기 때문이다. 힘들었으니까, 쓸쓸했으니까, 글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돌아보면 멀찍이 보이는 등대 하나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헤엄쳐 온 느낌이다. 고되었지만. 그게 나를 피어나고 했고 육지에 다다른 나는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액체를 손을 닦아내며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해냈구나. 근데 정말 힘들었어. 정말이지 말이야.
멋대로 얘기해 본다.
나는 이제 좋은 스승이 되려고 한다. 좋은 선생이자 길잡이가 되어주는 게 나의 꿈이다. 클래스를 하며 모든 사력을 다하는 건 그들이 외로운 고통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글을 쓰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겪은 고독이 누군가에는 비단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완성이 아닌 길을 닦는 법을 알기에 누군가의 인고를 줄여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구인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 참된 조언을 해준다면 나는 그 말을 복처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여전히 부족하고 초라한 나라서, 원하던 곳에 도달했지만, 마냥 웃지 못하는 나라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약하다. 나는 스승의 부재가 참 아쉬웠나 보다. 그러니 좋은 선생이 되겠다. 이건 투정이자 고백. 펜을 잡는 당신이 내 앞에 있다면 손을 잡아주면서 꼭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보이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꾸준히 남기다 보면 당신의 문장에 울고 웃는 사람이 꼭 나타날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기록은 삶의 자존이고 펜을 잡은 당신만큼 찬란한 건 없다고.
글출처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신하영에세이)
고2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가면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당차게 말하던 그 꿈은 이루었냐고 물어봐 주실까? 모르겠다. 나는 그런 것과 줄곤 거리가 멀었기에 아무것도 가능할 수 없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것저것 조언받는 친구가 참 신기했다. 사실 필요하나 싶었다. 친구와 똘똘 뭉쳐 과제를 헤쳐 나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언제까지나 무색무취였던 나에겐 애정과 존경을 주고받는 사제지간 따위는 없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선배가 있는 사람, 궂은 고생은 하지 않게끔 자신이 닦아놓은 길을 알려주는 스승. 나는 그들의 교류를 목격하며 어딘가 서글펐나 보다. 갈피를 못 잡고 불필요한 실수를 하는 내게 매를 드는 선생이 있었으면 했나 보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기를 바랐던 나인데 왜 이제 와서 툴툴거리는 걸까. 눈 안에 총기가 가득했던 그때, 내가 먼저 다가갔어도 괜찮았을 텐데, 왜 모든 탓을 그들에게 돌리는 걸까. 이 또한 투정임을 안다. 나는 스승이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정말 외로웠다. 학창 시절에 춤만 추고 놀러 다니기 바빴던 애가 감성 에세이를 쓴다니. 친구들은 삼류 작가라는 둥, 억지스러워서 구역질이 나온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썼다. 원래 좋아하는 것에 정신을 잃으면 남의 시선 따위는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욕을 먹어도 쓰고 용케도 그걸 인터넷에 올린 나는 예술가가 된 것처럼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외로웠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 그땐 한 명에 대해 감사함보단 9명의 미움이 더 켰으니까.
어딘가에 작가 선생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그 선생이 이 길이 험난해도 너는 결국 사랑받을 거라고 내게 말해줬으면 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SNS를 시작했다. 그곳엔 나보다 몇 년은 앞서 활동하던 멋진 작가들이 있었다. 나는 자신만의 감성으로 부지런하게 독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그들을 동경했다. 무엇보다 "오늘도 위로받고 가요."라는 댓글을 남겨주는 독자가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내 이야기가 위로되길 바랐다. 그래서 묵묵하게 썼다. 엉덩이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마음으로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주 오랫동안 진득하게 썼다.
20대 초에는 등단을 목표로 소설을 썼다. 필요한 모든 것을 작은 명품 가방에서 꺼내는 한 여자의 이야기. 치열한 삼각관계에서 진짜 사랑을 깨닫는 남자의 이야기, 사후 세계에서 자신의 장례식장을 바라보는 주인공 등 매일 소설을 읽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제 나름 세계관을 만들기도 했다. 300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썼을 덴 어딘가에 흘린 듯 살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이토록 즐겁다니!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고 천장을 보며 다음 장면을 구상하고 일어나면 연필부터 쥐기 바빴다.
많은 작가 중 에쿠니 가오리를 가장 좋아했다. 나는 소소하고 낭만적인 문체를 가진 그녀의 모든 글을 애중했다. 언젠가 에쿠니 가오리 글을 쓰고 싶어 시중에 나온 소설을 모조리 읽고 필사하며 남몰래 그녀를 흠모했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으면 외롭지 않다고 했던가. 고독했던 나는 아무런 보상 심리 없이 쓰고 또 썼다. 그게 돈이 되냐는 말을 들어도, 안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죽었다’라는 전자책으로 시작해 장편소설 그리고 3권의 에세이집까지. 시간이 지나 동경하던 그 자리에 서서 이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됐다. 한번은 어느 독자에게 이런 DM이 왔다.
-작가님 문체는 뭔가 에쿠니 가오리 같아요.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그 독자를 아직 잊지 못한다. 그 한마디로 외로웠던 과거를 보상받는 듯했다. 한동안 미소를 머금고 살았다. 그러나 변함없이 마음 한구석은 공허하다 못해 빈 우주에 놓인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나에겐 스승이 없다. 나에게 이 길로 가라, 저런 선택을 하라는 어른은 없었다. 부모님은 늘 나를 존중해 주었으니 그걸로 감사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서 뚝심 하나만 가지고 개미처럼 썼던 내가 자랑스럽다. 자존심이 센 걸까? 아니면 돈 욕심이 없어서인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작가 세계를 벗어나기 싫었던 건 내가 다 이기고 사랑받고 또 받아 마음이 풍만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길 바랐기 때문이다. 힘들었으니까, 쓸쓸했으니까, 글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돌아보면 멀찍이 보이는 등대 하나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헤엄쳐 온 느낌이다. 고되었지만. 그게 나를 피어나고 했고 육지에 다다른 나는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액체를 손을 닦아내며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해냈구나. 근데 정말 힘들었어. 정말이지 말이야.
멋대로 얘기해 본다.
나는 이제 좋은 스승이 되려고 한다. 좋은 선생이자 길잡이가 되어주는 게 나의 꿈이다. 클래스를 하며 모든 사력을 다하는 건 그들이 외로운 고통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글을 쓰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겪은 고독이 누군가에는 비단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완성이 아닌 길을 닦는 법을 알기에 누군가의 인고를 줄여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구인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 참된 조언을 해준다면 나는 그 말을 복처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여전히 부족하고 초라한 나라서, 원하던 곳에 도달했지만, 마냥 웃지 못하는 나라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약하다. 나는 스승의 부재가 참 아쉬웠나 보다. 그러니 좋은 선생이 되겠다. 이건 투정이자 고백. 펜을 잡는 당신이 내 앞에 있다면 손을 잡아주면서 꼭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보이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꾸준히 남기다 보면 당신의 문장에 울고 웃는 사람이 꼭 나타날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기록은 삶의 자존이고 펜을 잡은 당신만큼 찬란한 건 없다고.
글출처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신하영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