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강 할머니의 기다림
제일 안전한 피난처는
어머니의 품속이다.
강원도의 산골은 도회보다 일찍 추위가 찾아온다. 학생 시절, 소금강으로 알려진 연곡을 찾은 적이 있다. 젊은 혈기에 일부러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찾아 오른다며 샛길로 들었다가 그만 엉뚱하게 길을 헤맸다. 밤은 깊고 한 겹 더 껴입은 스웨터로도 추위는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게다가 길을 잃었다는, 낯선 길에서 어둠 속에 파묻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훨씬 섬뜩했다. 다행히 반달에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너그러운 달빛 몇 조각이 허락된 밤이었고, 가지고 간 헤드램프도 있어 길이 매섭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밤새 그렇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지치고 두려운 나머지 헛것이 보인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대 그 작은 불빛 하나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 지금도 그 빛을 기억할 정도이다. 그저 더 이상 길 헤매지 않고, 밖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염치 불고하고 찾아갔다.
넉넉지 않은 달빛으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작고 초라한 집이었다. 어떻게 그런 산중에 집이 있는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말로만 듣던 화전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 없이 일단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그렇게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는 허름한 촌가에는 할머니 한 분만 계셨다. 보통 노인들은 초저녁 일찍부터 잠에 드시는데, 할머니는 주무시지 않고 불을 켜두셨던 덕분에 그 불빛을 볼 수 있었으니 참 운이 좋았던 셈이다.
늦은 밤 낯선 이의 방문에 놀라면서도 할머니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묻지도 않고, 그저 밥은 먹었느냐며 감자를 내주던 할머니의 손은 마치 거북 등처럼 굵은 선으로 주름져 있었다.
그때가 1970년대 말이었으니, 깊은 산골까지는 전기가 놓이지 않았던 시절이라 코굴의 불이 흔들리며 벽에 그림자를 그렸다. 코굴이란 강원도 산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종의 벽난로와 같은 것인데, 생김새가 사람의 콧구멍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진 가득 머금은 관솔을 땔감으로 사용해서 그런지 향기가 독특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맛있는 감자를 맛본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지 싶다.
“할머니, 여기 혼자 사세요?”
“열일곱에 시집와서 쭉 여기 살았지.”
“할아버지는요?”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인데, 무람없이 나는 불쑥 그렇게 여쭸다.
“영감은 벌써 세상 뜬 지 수무 해 가깝다우.”
그러고 보니 벽에 걸린 빛바랜 사진 속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무섭지 않으세요? 자녀분들과 함께 나가서 사시지요.”
당시는 고된 산골의 삶보다는 도회의 편리함이 더 좋다고 느끼던 나이였으니 그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예만한 곳이 어디 있겠수? 예서 살다 영감 곁으로 갈 때만 기다리는 거지.”
벽에는 서너 개 액자에 여러 장의 사진이 기워져 걸려 있었다. 예전 시골집에는 그렇게 가족하가 액자 몇 장의 사진으로 담겨 있곤 했다.
“자녀분들이 자주 찾아오나요?”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깃드는 걸 보고서야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뒀는데, 딸은 재작년에 죽었고 아들은 멀리 떠나 있어서 오지 못한다우.”
가슴 아픈 사연에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는데,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여셨다.
“갸가 올 때까정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몰라.”
“왜요? 요즘은 외국에 가 있어도 비행기만 타면 금방 올 수 있는걸요.”
해외에 건설 인부로 나간 이들이 많을 때였으니 아들도 그런 줄 짐작했다.
“그럼 차라리 다행이지.”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갸가 가막소에 있어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가막소에 갈 아가 아닌데, 어릴 때부터 착한 놈이었는데, 무신 이유가 있었갔지.”
아들은 있지만 깊은 산중에서 홀로 사시는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저 나지오(라디오)도 갸가 사다준 거라우. 갸가 참 효자야.”
건전지가 없어서 아무 소리도 토하지 못하는 라디오였지만, 할머니에겐 아들이 효성의 징표인 양 자랑스럽게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게 비상용 건전지가 있어서 갈아 끼웠더니 ‘지지직’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어리아이처럼 해맑아졌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들이 돌아온 듯······.
아들이 언제 출소하는지, 그런 건 묻지도 않았다. 다만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아려한 사랑만 가득 느끼고 싶었다. 무슨 죄를 짓고 교도소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착한 할머니의 아들이라면 일부러 아주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 짐작되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게 다였다.
할머니는 옆방은 불을 때지 않아 춥다면 한사코 아랫목 자리를 내주셨다. 가까스로 사양하고 그냥 좁은 방 윗목에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길 떠나기 전 배낭에 있던 라면과 쌀을 드렸더니, 할머니는 손사래 치며 오히려 옥수수 한 더미를 배낭에 넣어주시고서야 활짝 웃으셨다.
그 이후로 연곡의 소금장을 찾은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그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다. 갈 일도 없었고 가는 길도 몰랐다. 그러나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 할머니가 떠오른다. 지금쯤 그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겠지.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대로 아들은 만나셨는지, 그 아들이 지금 그 집을 지키고 있는지. 모든 게 궁금하다. 굳이 내가 그 아들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기다렸는지 전해주지 않아도, 이미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있으리라, 돌아올 아들 때문에 그 깊은 산골의 허술한 집을 홀로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코굴의 관솔불처럼 방 안을 온기와 빛으로 가득 채우던 할머니의 사랑이 지금도 아련하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
어머니의 품속이다.
강원도의 산골은 도회보다 일찍 추위가 찾아온다. 학생 시절, 소금강으로 알려진 연곡을 찾은 적이 있다. 젊은 혈기에 일부러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찾아 오른다며 샛길로 들었다가 그만 엉뚱하게 길을 헤맸다. 밤은 깊고 한 겹 더 껴입은 스웨터로도 추위는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게다가 길을 잃었다는, 낯선 길에서 어둠 속에 파묻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훨씬 섬뜩했다. 다행히 반달에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너그러운 달빛 몇 조각이 허락된 밤이었고, 가지고 간 헤드램프도 있어 길이 매섭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밤새 그렇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지치고 두려운 나머지 헛것이 보인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대 그 작은 불빛 하나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 지금도 그 빛을 기억할 정도이다. 그저 더 이상 길 헤매지 않고, 밖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염치 불고하고 찾아갔다.
넉넉지 않은 달빛으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작고 초라한 집이었다. 어떻게 그런 산중에 집이 있는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말로만 듣던 화전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 없이 일단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그렇게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는 허름한 촌가에는 할머니 한 분만 계셨다. 보통 노인들은 초저녁 일찍부터 잠에 드시는데, 할머니는 주무시지 않고 불을 켜두셨던 덕분에 그 불빛을 볼 수 있었으니 참 운이 좋았던 셈이다.
늦은 밤 낯선 이의 방문에 놀라면서도 할머니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묻지도 않고, 그저 밥은 먹었느냐며 감자를 내주던 할머니의 손은 마치 거북 등처럼 굵은 선으로 주름져 있었다.
그때가 1970년대 말이었으니, 깊은 산골까지는 전기가 놓이지 않았던 시절이라 코굴의 불이 흔들리며 벽에 그림자를 그렸다. 코굴이란 강원도 산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종의 벽난로와 같은 것인데, 생김새가 사람의 콧구멍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진 가득 머금은 관솔을 땔감으로 사용해서 그런지 향기가 독특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맛있는 감자를 맛본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지 싶다.
“할머니, 여기 혼자 사세요?”
“열일곱에 시집와서 쭉 여기 살았지.”
“할아버지는요?”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인데, 무람없이 나는 불쑥 그렇게 여쭸다.
“영감은 벌써 세상 뜬 지 수무 해 가깝다우.”
그러고 보니 벽에 걸린 빛바랜 사진 속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무섭지 않으세요? 자녀분들과 함께 나가서 사시지요.”
당시는 고된 산골의 삶보다는 도회의 편리함이 더 좋다고 느끼던 나이였으니 그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예만한 곳이 어디 있겠수? 예서 살다 영감 곁으로 갈 때만 기다리는 거지.”
벽에는 서너 개 액자에 여러 장의 사진이 기워져 걸려 있었다. 예전 시골집에는 그렇게 가족하가 액자 몇 장의 사진으로 담겨 있곤 했다.
“자녀분들이 자주 찾아오나요?”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깃드는 걸 보고서야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뒀는데, 딸은 재작년에 죽었고 아들은 멀리 떠나 있어서 오지 못한다우.”
가슴 아픈 사연에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는데,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여셨다.
“갸가 올 때까정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몰라.”
“왜요? 요즘은 외국에 가 있어도 비행기만 타면 금방 올 수 있는걸요.”
해외에 건설 인부로 나간 이들이 많을 때였으니 아들도 그런 줄 짐작했다.
“그럼 차라리 다행이지.”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갸가 가막소에 있어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가막소에 갈 아가 아닌데, 어릴 때부터 착한 놈이었는데, 무신 이유가 있었갔지.”
아들은 있지만 깊은 산중에서 홀로 사시는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저 나지오(라디오)도 갸가 사다준 거라우. 갸가 참 효자야.”
건전지가 없어서 아무 소리도 토하지 못하는 라디오였지만, 할머니에겐 아들이 효성의 징표인 양 자랑스럽게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게 비상용 건전지가 있어서 갈아 끼웠더니 ‘지지직’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어리아이처럼 해맑아졌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들이 돌아온 듯······.
아들이 언제 출소하는지, 그런 건 묻지도 않았다. 다만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아려한 사랑만 가득 느끼고 싶었다. 무슨 죄를 짓고 교도소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착한 할머니의 아들이라면 일부러 아주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 짐작되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게 다였다.
할머니는 옆방은 불을 때지 않아 춥다면 한사코 아랫목 자리를 내주셨다. 가까스로 사양하고 그냥 좁은 방 윗목에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길 떠나기 전 배낭에 있던 라면과 쌀을 드렸더니, 할머니는 손사래 치며 오히려 옥수수 한 더미를 배낭에 넣어주시고서야 활짝 웃으셨다.
그 이후로 연곡의 소금장을 찾은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그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다. 갈 일도 없었고 가는 길도 몰랐다. 그러나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 할머니가 떠오른다. 지금쯤 그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겠지.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대로 아들은 만나셨는지, 그 아들이 지금 그 집을 지키고 있는지. 모든 게 궁금하다. 굳이 내가 그 아들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기다렸는지 전해주지 않아도, 이미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있으리라, 돌아올 아들 때문에 그 깊은 산골의 허술한 집을 홀로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코굴의 관솔불처럼 방 안을 온기와 빛으로 가득 채우던 할머니의 사랑이 지금도 아련하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
여명 2011.10.19. 21:57
기나긴밤..할머니 무릎에서 옛날 이야기 듣는것 같은 글입니다.
요즈음 같아선 택도 없지요...
야밤에 손님을 재워준다는것이...
라디오도..그냥 그려 집니다.
그러나...
어머니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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