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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편지

오작교 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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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일 년 일 개월 만에 법정 스님마저 떠나시니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분들이 허전한 마음을 표현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 불자들이 내게 보낸 편지에서 스님의 법문이나 책에서 발췌한 좋은 글귀들로 그리움을 달래는 그 마음들이 하도 간절하고 지극하여 감동이 되었지요. 날더러 건강을 되찾아 좀 더 오래 살라는 기원도 함께 곁들인 글들이 많아 고마웠습니다.

   스님의 상좌 스님들이 보내준 법정어록의 책갈피들을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때로는 스님의 추모 영상 자료를 보면서 나도 매번 눈물이 필 돌곤 했습니다. 스님 생전에 문병 한번 못 간 것, 고별식에도 못 간 것이 다 맘에 걸렸지만 스님은 나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실 것만 같았습니다.

   클라우디아 수녀님, 요즘은 비실비실하지 않습니까? 마음 내킬 때 훌쩍 다녀가세요. 달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산에는 요즘 오동나무 꽃이 지고 있어요. 작약이 새로 피어나고 후박나무 그늘도 두터워 갑니다. 철새들이 다시 옛 깃에 찾아와 깃듭니다. 그럼 산에서 만납시다. 단오절 불일암에서 합장 어느 날 조그만 그림엽서 한 장에 스님이 적어 보내신 글입니다. 강원도에 계실 적에도 그렇고, ‘그럼 산에서 만납시다!’ 하며 일부러 불일암에도 초대해 주셨는데 선뜻 가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됩니다.

   오늘은 흰 구름 흘러가는 하늘을 보며 ‘스님, 청안하신가요? 구름 수녀님 하고 한 번 더 불러 주세요! 라고 청해 봅니다. 스님의 친필을 갖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나를 스님께 소개해 준 친한 친구에게 스님의 옛 편지들을 보내주고 나니 나에겐 남은 것이 그리 많지 않지만 스님 생각이 나면 한 번씩 편지들을 꺼내 다시 읽어 보는 기쁨을 누리곤 합니다.

   1980년대 불일암에서 보내신 편지와 2000년대 강원도 오두막에서 보내신 편지들을 스님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고 싶어 소개해 봅니다. 비록 나 개인에게 보내신 글이긴 하지만 한 편의 묵화 같고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내용이라 여겨지네요. 스님의 예리한 눈빛과 음성, 정겹고 따뜻한 속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편지에서 스님이 좋아하시던 푸른 소나무와 작설차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기도서 감사히 받았습니다.
몇 장 읽은데 모두가 귀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수녀님이 지니셨던 것을 제게 건네주니 더욱 고마울 뿐입니다. 성경 소구도 찾아 읽겠습니다.
지루한 장맛비가 개인 것 같아 우선 마음이 후련합니다.
숲이 한층 풍성해진 것 같아요. 오늘은 아침부터 여름 옷가지를 꺼내어 풀 멱여 손질하고 질근질근 밟아 다렸습니다.
여름이 구체적으로 다가섭니다. 홑이불도 삼베로 갈았습니다.
빗속에서 애처롭게 피어나던 달맞이꽃이 며칠 전부터는 제대로 환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갓 피어난 그 노랑빛은 얼까지 드러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꽃의 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으로 이루어졌지요.
그러기에 그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것이겠지요.
이 여름에도 건강하십시오.
1980년 7월 5일
산에서 합장


나는 수녀님께 아무것도 드린 것이 없는데 여러 가지로 받기만 합니다.



수녀님, 11월의 숲은 차분하여 좋습니다.
가진 것 다 털어 버리고 난 후의 홀가분함 같은 걸 느낄 수 있어요.
가랑잎이 수북이 쌓인 숲길을 거니노라면 산에서 사는 고마움을 지닙니다.
우리 불일은 김장도 다 끝냈고, 정랑에 넣을 가랑잎도 쌓아 두었고, 땔감도 넉넉합니다. 이제는 눈이 내려도 끄떡없습니다. 오늘은 가까운 장에 나가 국수 삶아서 건져 내는 건지개도 하나 사 왔습니다.
저번에 부산 갔을 때 전화 몇 번 했었는데 엉뚱하게 파출소가 나오고 가정집이 나오더군요. 오륜대 김신부님한테 묵으면서 전화번호 바뀐 걸 알았지요.
아주 건강하고 기쁘고 생생한 날들을 살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수도자에게는 건강이 유일한 밑천이지요. 심신이 하나임을 잊지 마세요.
나는 얼마동안 잡문 안 쓸 것입니다. 없는 듯이 묻혀서 속 뜰이나 가꿀래요.
‘십자가의 길’ 팀들한테 좋은 수도자 되라고 안부 전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날이기를 빕니다.
1980년 11월 27일
법정 합장




수녀님. 연일 눅눅하고 답답한 안개가 서리고 안개 속에서 후두둑 낮도깨비 같은 비가 내리곤 했는데, 오늘은 화창하고 맑게 개었습니다. 얼마 만에 푸른 하늘을 보는지……. 밀린 옷가지를 빨아서 빨래줄 가득히 널어놓고, 차 한 잔 마시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좀 듣다가 창밖에서 너울거리는 파초 잎에 눈을 씻고 나서 이렇게 광안리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7월 1일에 띄운 사연과 《묻혀 있는 보물》, 감사히 받았습니다.
일전에 《가톨릭 신문》을 보고 올해가 베네딕도 성인 탄신 1,500주년 되는 해임을 알았습니다.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수도자의 전형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규칙>에 들어 있는 성인의 수도 정신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그렇게만 행할 수 있다면 누구나 틀이 잡힌 수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의 가르침이 현대에는 맞지 않네 어쩌네들 ‘나약한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 정신과 그 가르침은 현대처럼 사람이 안이하게 흩어지기 쉬운 때에는 더욱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규칙서를 대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져 가는 우리들의 일상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안거는 8월 25일(음 7월 보름)에 끝나게 됩니다. 안거가 끝나고 찬바람이 돌 무렵, 바다 구경 겸 부산에 한번 들를까 합니다. 그 동네 들른 지도 오래됐군요.
갈수록 세월이 재미없어집니다. 이럴수록 수도자들은 제정신 똑바로 찾아 영성을 더욱 맑게 다스려야겠지요. 참 까르멜 언니 수녀님을 잘 계시는지요.
더위에 지지 말고 안팎으로 청정하십시오.
1981년 7월 7일 아침 산에서 합장




구름 수녀님께 밖에 나갔다 돌아와 뒤늦게 수녀님의 활자화된 정다운 편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광안리 바닷가 그 집 간 지도 오래되고, 수녀님이 우리 불일에 다녀간 지도 한참 됐어요. 그 사이 하산하여 낯선 거리에서 스쳐지나가긴 했지만요.
나이가 드는지 내 자신은 세월을 잊고 사는데 비행기 표를 살 때면 10% 경로 할인(65세부터)을 해주어요. 고맙기보다는 씁쓸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오늘은 비가 개어 고추밭 매 주고, 아욱 뜯어 끓이고, 상추와 게일로 쌈 싸 먹으려고 점심거리 챙겨 두었습니다.
지금 생각에는 7월 하순에 잠시 불일에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오려고 하는데 그때 인연이 닿으면 불일에 오셔서 우리 오랜만에 ‘현품대조’했으면 싶습니다.
요즘 어떤 책 읽느냐고 했는데 프란츠 알트의 《생태주의자 예수》(나무심는사람 刊)와 간디의 제자 비노바 바베의 《천상의 노래(바가바드기타 이야기)》(실천문학사 刊)를 읽으면서 산방의 고요를 누립니다.
장마철에 젖지 말고 밝게 사세요.
광안리 식구들에게도 초록빛 문안을…….
2003년 7월 1일
법정 합장




구름 수녀님께 오랜만에 편지 받아 보고 또 씁니다. 우표를 받고 보니 수녀님은 전이나 다름없이 정정하구나 싶습니다. 고마워요.
편지와 책을 읽었습니다. 70여 년 동안 이 몸을 끌고 다녔더니 부품이 삐걱거려 지난겨울 한철 병원을 드나들며 정비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기적 같기만 하고 둘레의 모든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앓고 나면 철이 든다더니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언제 만났는지 까마득하네요. 건강할 때 가까운 벗들과 자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숫타니파타》를 펼치면서 출가수행자의 길을 거듭 음미하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수녀님. 늘 청정하셔요.
2009 무자년 입하절
강원도 수류산방에서 법정 합장




글출처 :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해인 산문집,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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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 2014.02.14. 15:57

법정스님 편지 감명깊게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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