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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배려하는 길이 되어서

오작교 3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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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우리 수녀원에 손님으로 오신 어느 신부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 나갔다. 마침 썰물 때라 더욱 넓어진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저마다 새해의 복을 비는 글들을 적어 놓은 게 눈에 띄었다. 누가 시작을 했는지 모르지만 모래 위의 낙서는 아주 길게 이어져 우리를 미소 짓게 했다.

   하트 모양의 그림을 그려 놓고 ‘사랑해, 영원히!’, ‘행복하자, 우리!’ 하는 연인들의 표현도 아름답고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어 놓은 인사말도 새삼 정겹게 여겨졌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 나온 부부, 솜사탕을 사 먹으며 담소하는 젊은이들,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까지 다들 평화로워 보였다.

   낯선 사람들끼리도 자연스럽게 복을 빌어 주며 덕담을 나누는 또 한 번의 새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서 행복한 사랑의 길이 되면 좋겠다.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라는 길 위에서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꿔 가며 조금씩 사랑을 넓혀 가는 길이 되면 좋겠다. 이렇게 살려면 매순간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 하는 마음으로 깨어 사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잘 아는 혁이라는 청년이 이웃에게 실천한 애덕의 배려가 따뜻한 감동을 준다. 한번은 그가 동대구에서 부산으로 오는 오후 3시 30분 무궁화호 열차를 탔는데, 바로 옆자리에 어린 두 딸과 동행한 일본인 남자가 청년에게 자꾸만 무어라고 말을 걸어왔다. 청년은 일본어를 모르는데다 영어로도 말이 안 통하자 일어를 전공한 친구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대화를 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내용은 그 일본인이 5시 30분에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열차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배를 놓칠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져 보니 역에 내려 택시를 타도 늦을 것만 같자 청년은 부산 지리를 잘 아는 지인에게 긴급 문자를 보내 마중을 나오도록 했고, 그 일본인 일행을 5시 10분까지 터미널에 데려다 주어 무사히 배를 탈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서 혹시라도 나쁜 사람으로 오인해 불안해할까 싶어 학생증까지 보여 주며 안심시키면서 목적지까지 동행한 청년……. 미안한지 자꾸만 돈을 주려고 하던 그 일본인은 두 딸과 함께 배에 오르는 내내 머리를 조아려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하더라고 했다.

   다른 이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내가 고맙다고, 잘했다고 이메일을 보내니 청년은 내게 이렇게 답을 해왔다. “사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구 그래도 수녀님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사실 별거 아니긴 한데……. 부산역에 기꺼이 마중 나와 준 친구 그리고 통역을 도와준 그 친구 덕분에 좋은 일 하고, 그 일본분도 한국에 대해 마지막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가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앞으로 더 나은 모습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단지 옆자리에 앉았다는 인연으로 끝까지 자기 일처럼 적극적인 도움을 준 한 한국인 청년의 행동이 그 일본인은 얼마나 고마웠을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외교를 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 장면 장면을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길이 된다는 것, 복을 짓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귀찮아하며 피하거나 모르는 척하지 않는 관심, 겉도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정성, 선한 일을 하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이웃에게 무상으로 빛을 주는 축복이 되고 사랑의 길이 되는 행동일 것이다. 욕심과 이기심을 아주 조금만 줄여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달의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평범한 일들과 시간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을 잘 꺼내고 펼쳐서 길이 되게 하자. 이 길로 자주 이웃을 초대하자.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 마주치게 될 크고 작은 일들이 잘만 이용하면 모두 다 나에게 필요한 길이 될 것임을 믿는다.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 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 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 이해인, <길 위에서> 전문

글출처 :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해인 산문집,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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