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삶에 한 주걱 맑은 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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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넉넉히... / 느림과 비움

오작교 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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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넉넉히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은,
스스로 잘 맞추어 그것들 아래에 있기 때문이요,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물은 흐름이 넓어질수록 낮아지고 넓어진 것일수록 느려집니다. 계속의물은 성질이 급하고 빠르게 흐릅니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물은 순해집니다. 저는 낮추는 것이지요. 무릇 남 앞에 서려는 자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를 더 자주 돌아보아야 합니다.

   간밤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소나기가 들이쳐 책상 위에 책들이 젖었습니다. 사납게 장대비 쏟아지는 밤에도 어김없이 휘파람새가 울었지요. 꼭 안마하러 밤길 나선 장님 안마사의 피리소리 같습니다. 어떤 날 밤은 소름끼치지요. 누군가 하고 문 열어 내다보면 길엔 어둠만 가득할 뿐 텅 비어 있으니까요. 피리소리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떠다닙니다.

   이 세상에 몸 받고 나와 어느덧 나도 남자의 후반기 생에 들어섰습니다. 밥벌이의 치욕스러움에 진저리치고 크고 작은 우여곡절 지나갔지만 기계(奇計)와 묘수(妙手)에 기대지 않고 우직한 정공법으로 삶을 꾸려온 것에 대해 자부심도 없지 않습니다. 경학(經學)에도 역경(易經)에도 조예는 깊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에 이름을 낸 자들이 지은 책들을 두루 읽었지요.

   시절 인연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요. 좋은 만남도 있고 나쁜 인연도 있었지요. 기필코 도움이 되려는 도반(道伴)도 있었지만 꼭 해코지하려는 자들도 끼어 있습니다. 없는 말 지어내고 뒤에서 느닷없이 뒤통수치고 뛰어가는 자 발 걸어 넘어뜨리는 등 흉악한 방식으로 남을 해코지하고 그 끝이 좋은 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이익을 취하고 머지않아 죽는 자도 두엇 목격했지요.

   저는 시골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뒤론 도시에 나와 견문을 넓힐 기회도 가졌지요. 예술이라는 불의 키스를 받고 환희심을 알았지요. 사람의 마음과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자 애썼지요. 비록 췌마술(상대의 발언을 통해 그가 드러내지 않은 감춰진 정황을 이해하는 기술)을 능히 익히지는 못했지만 서툰 대로 익힌 그 능력으로 사업을 일구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것도 내 인연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하루아침에 가차 없이 뒤엎어 버렸습니다.

   그보다 더 공들인 것은 내 마음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요즘 그 마음이 어지럽고 일렁여 혼란스럽습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고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네요. 나라의 군신(君臣)들이 한꺼번에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사사로움에 발목 잡혀 허송세월하고 있는 게 눈에 어른거려 마음 답답합니다. 나라살림과 무관한 한촌(閑村)에 사는 일개 서생(書生)의 마음이 이러할진대, 나라 걱정이 큰 의인들은 잠 못 드는 밤도 많겠습니다.

   제 입으로 온갖 것 가 삼킨 뒤 배 그득 채워 소화시킨 똥을 누고도 제 밑 제 손으로 닦지 않으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제 똥구멍 언저리에 묻은 똥에서 풍겨 나오는 구린내를 두고 모두 남의 탓이라 하니 한심한 일이지요. 난잡(亂雜)이 정도(正道)로 포장되고 제 사리사욕 취하는 행동을 공익(公益)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횡행하는 세상입니다.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세월입니다. 환난이 문 밖에 어슬렁거리는 데 안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느라 그게 도둑놈인지 손님인지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청맹과니에 탐욕만 가득 찬 자들에게 집안 살림을 맡겼으니 우환 피하기 어렵게 되었지요. 나 혼자 걱정이 깊어 뼛속이 비고 속이 끓는다고 물 안 먹으면 세상이 편해질까요? 맨 정신으로 바로 보려고 버팁니다. 오히려 술 마시고 생각 무디게 만들어 괴로움 피하려 드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애써 술은 피합니다.

   전반생은 어두웠으나 후반생은 영명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몸 추스르고 어금니 굳게 물고 마음 다잡아야 하겠지요. 삿된 생각 덜어내고 처음 마음에 세운 뜻을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남자가 후반의 생을 경영하며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덕담은 그 사람은 처음도 좋더니 끝까지 좋구나! 라는 것이지요. 그도 안 되면 그 사람 처음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구나! 그런 차선(次善)도 좋습니다.

   온순하면서도 엄숙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고 공손하면서도 편안한 어른이 되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합니다. 한번 맡은 일은 반드시 실행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줄 알아야 하겠지요. 사람은 안팎의 우환 속에서 마음이 단단해지고 인격이 여뭅니다. 빈궁하면 부모도 고갤 돌리고 출세하면 뻣뻣하던 자들도 와서 고개 숙이는 법이지요. 마음에 밝은 빛 그득하면 세상에 못 볼 것 없습니다. 아직 하늘이 어둡습니다. 한두 차례 더 소나기가 퍼붓겠습니다.

글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뿌리와이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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