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정희 씨는 겨우내 닫아두었던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정희 씨 얼굴을 보드랍게 어루만졌다.
정희 씨는 꿉꿉한 이불을 하나하나 창가에 널며 아들 진호에게 말했다.
"진호야, 이젠 봄이구나. 너무 따뜻하다, 그치?" "응, 좋아."
"우리 진호 생일이라서 그런가?"
"엄마, 지금 빨리 문방구에 가서 로봇 사 줘.
내 생일날 엄마가 로봇 사 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래. 엄마가 로봇 사 줄게. 근데 태호가 자고 있으니까,
지금은 안 돼." "태호 자니까 빨리 문방구에 갔다 오면 되잖아."
"진호야, 잠들었다고 어린 동생을 혼자만 집에 두고 나갈 수 는 없지 않니?
그사이에 태호 깨서 울며 어쩌려고." 정희 씨는 달래듯 진호에게 말했다.
하지만 동생만 사랑해 준다고 늘 샘을 내던 진호는 금세 볼멘소리가 되었다.
"엄마는 맨날 태호만 좋아해. 나는 하나도 안 좋아하고."
정희 씨는 진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앗다.
"아냐, 진호야. 엄마가 우리 진호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럼 빨리 로봇 사 줘. 내가 어제 문방구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그 로봇이 하나밖에 안 남았대. 다른 사람이 먼저 사 가면 어떻게 해. 빨리 사 줘."
정희 씨는 무작정 보채는 진호를 달래보려 했지만 진호는 막무가내였다.
다른 날도 아니고 생일날 아이한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호를 잠자는 동생 곁에 두고 가자니진호가 원하는 로봇이
어느 것인지를 정희 씨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진호 손에 큰돈을 들려
문방구에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희 씨는 하는 수 없이
거실에서 잠자는 태호를 혼자 남겨두고 진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십 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린데, 그사이에 깊이 잠든 태호가 깨지는 않을 거라고
정희 씨는 생각했다. 로봇을 손에 들고 문방구를 나오는 진호는
큰 기쁨에 콧구멍 까지 벌쭉 벌어졌다. 너무 좋아 쿡쿡 웃고 있는
아이 얼굴를 바라 보며 정희 씨 얼굴에도 활짝 봄꽃이 피어났다.
"진호야, 엄마 아빠가 태호만 예뻐하는 게 아냐.
태호는 아직 어리니까 더 많이 보살펴줘야 하거든.
우리 진호도 엄마 마음 알 지?"
"엄마, 나는 태호가 미울 때가 많아.
옛날엔 맨날맨날 나만 안아줬는데 지금은 태호만 안아주잖아."
"엄마가 그랬나? 미안해, 진호야.
앞으로는 우리 진호도 많이 안아줄게. 엄마가 잘못했어."
정희 씨는 진호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희 씨는 진호 손을 꼭 잡고 연립주택 골목을 털레털레 들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정희 씨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정희 씨는 너무도 아찔한 광경에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희 씨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의 3층 창문 밖에
이제 다섯 살 된 태호가 매달려 울고 있던 거였다.
정희 씨는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태호는 베란다 밖으로 나와 있는 화분 받침대의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간신히 붙들고 매달려 있었다.
쇠파이프를 두 손으로 꼭 붙든 태호는
창문 아랫벽에 나 있는 작은 틈 사이로
발 한 쪽을 가까스로 끼우고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태호의 울음소리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화단 쪽에서 애를 태우며
발을 구르던 동네 아주머니가 정희 씨를 보고는 손을 홰홰 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태호 엄마, 저걸 어째··· 태호가···.
" 잠시 안절부절못하던 정희 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검지를 세워 입에 갖다 대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아주머니에게 신호를 보냈다. 엄마가 아래 있다는 것을 알면
태호가 잡고 있는 손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태호 엄마, 태호가 외벽 틈새에 발 한 쪽을 의지하고 있으니까
빨리 들어가면 끌어올릴 수 있을 거야." 정희 씨는 아주머니와 진호에게
절대로 태호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고는
연립주택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3층 계단을 헐레벌떡 단숨에 뛰어 올라가 대문에 열쇠를 끼우는 정희 씨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을 때,
창 밖 화분대에 매달려 겁에 질려 울고 있는 태호의머리가 보였다.
그리고 베란다에는 태호가 딛고 올라선 식탁 의자가 보였다.
잠에서 깨어난 태호가 창 밖으로 엄마가 오는 걸 보려고 거실에 있던
식탁 의자를 베란다까지 끌고 나갔던 거였다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선 정희 씨는 석고상처럼 몸이 굳는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온몸을 엄습해 왔다.
정희 씨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미소를 지으며
태호 쪽으로 양팔을 내밀었다.
"태호야, 엄마가 가서 안아줄게. 꼭 붙들고 있어. 알았지?"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태호는 떠나갈 듯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정히 씨는 한 걸음 한 걸음 태호가 매달려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의 다가가 태호의 손을 낚아채려는 손간 태호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창 밖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태호의 비명 소리에 정희 씨는 잠깐 정신을 잃고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정희 씨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태호가 떨어진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태호의 터질 듯한 울음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119 구조대의 모습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태호야··· 태호야···." 정희 씨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태호 이름을 부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3층에서 떨어진 태호는 구조대원의 품에 안겨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태호는 얼굴 한쪽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오른쪽 팔을 잘 가누지 못했다.
정희 씨는 태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태호, 괜찮아? 우리 태호 정말 괜찮은 거지?"
그때 가까이에서 울고 있던 진호가 고개를 푹 떨군채 정희씨에게 다가왔다.
진호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진호야. 괜찮아···.
" 잠시 후, 정희 씨는 태호를 데리고 119 구급차에 올라탔다. 그
리고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태호는 오른쪽 팔꿈치에 금이 갔을 뿐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다.
팔에 깁스를 하고 병원에서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면 좋아질 거라고 담당 의사는 말했다.
정희 씨는 그제야 마음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후회와안도감으로 목이 꺽꺽 막혀왔다.
그토록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태호가 무사할 수 있었던건
동네 아주머니들과 진호의 사랑 때문이었다.
진호는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위아래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들을 모두 다 불러냈다.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장롱 속에 있는 두터운 솜이불을 몇 개씩 가지고 나왔다.
태호가 떨어진 땅바닥 위에는 열개도 훨씬 넘는 솜이불이 아주 두텁게 쌓여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태호는 그 솜이불 위에 다리부터 떨어져서 무사할 수 있었다.
태호를 살린 건 이웃 아주머니들의 소박한 사랑이었다.
화창한 봄날, 추운 겨울을 이겨낸 땅 위엔 개나리,
진달래보다 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났다.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자주색··· 형형색색의 '이불 꽃' 들이
도시의 메마른 땅 위에 봄꽃보다 더 사랑스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인간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