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좋은 이야기를 올리는 공간
글 수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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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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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아침 햇살이
라일락꽃잎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한 아이가 나비를 쫓는다
나비는 잡히지 않고
나비를 쫓는 그 아이의 손이
하늘의 저 투명한 깊이를 헤집고 있다
그대의 눈은 나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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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화(山茶花)
그 해의
늦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산다화를 적시고 있다
산다화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산다화의
명주실 같은 늑골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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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장(章)
세계의 무슨 화염에도 데이지 않는
천사들의 황금의 팔에 이끌리어
자라나는 신들
어떤 신은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돋쳐 나는 암흑의 밤의 손톱으로
제 살을 핥아서 피를 내지만
살점에서 흐르는 피의 한 방울이
다른 신에 있어서는
다시 없는 의미의 향료가 되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천사들의 겨울에도
얼지 않는 손으로
나무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패배와 살육의 전장에서
한 개의 심장이 살아나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하늘에서 죽음의 재는 떨어지는데
이제사 열리는 채롱의 문으로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나래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
*** 김춘수 (金春洙 1922∼2004)
1939년 경기중학교를 마치고
1940년 니혼대학[日本大學(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퇴학 처분을 당했다.
귀국 후 통영중·마산고 교사를 거쳐
경북대·영남대 교수를 역임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을 거쳐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지냈다.
1981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자유아세아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대산문학상, 인촌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1946년 시화집 《날개》에 시<애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1922년 11월25일 경남 통영 출생
1940년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1946~1951년 통영중, 마산중·고 교사
1946년 ‘애가’ 발표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 펴냄
1950년 시집‘늪'펴냄
1959년 시집'꽃의 소묘', 시집'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61년 ‘시론’ 펴냄
1977년 시선집 ‘꽃의 소묘’, 시집'남천(南天)'
1979~1981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2년 시선집 ‘처용 이후’ 펴냄
1986~19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1989년 시론집'시의 이해와 작법'
1990년 시선집'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1991년 시론집'시의 위상', 시집'처용단장'
1993년 시집'서서 잠자는 숲', 산문집'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
1999년 시집'의자와 계단', 부인 명숙경 여사와 사별
2001년 시집'거울 속의 천사'
2002년 사화집'김춘수 사색사화집', 시집'쉰한 편의 비가'
2004년 '김춘수 전집',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수상
200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