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좋은 이야기를 올리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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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별을 쳐다보며 . 노천명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지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노천명 (盧天命 1911∼1957) 황해도 장연 출생 초명은 기선(基善)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고 졸업 후 1935년에 《시원(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의 배는(1935)》을 발표하였다. 1938년 간행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에 실린 대표작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사슴>을 비롯하여 <자화상> <귀뚜라미> <장날> 등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으며 제2시집 《창변(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에서 간행되었다. 고독과 향수, 소박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정감의 세계가 그의 초기 시들의 특색이다.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6·25 당시 옥고를 치른 체험과 거기서 오는 현실도피적인 시 반공애국시, 고향에의 향수 등이 실려 있다. 제4시집 《사슴의 노래》는 그의 사후 1958년에 간행되었으며 산문집으로 수필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등이 있다. 아버지가 죽자 1919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에 입학,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문단 친우로는 모윤숙(毛允淑)·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 등이 있다. 홍해성(洪海星)·유치진(柳致眞)·김진섭(金晉燮)· 서항석(徐恒錫) 등이 주관하여 결성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8년 체호프(Chekhov, A. P.)의 〈앵화원 櫻花園〉을 공연할 때 모윤숙과 출연하여 아냐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직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 뒤 신문사를 사임하고 잠시 북간도의 용정(龍井)과 연길(延吉) 등지를 여행하고 나서 《여성 女性》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사 문화부와 부녀신문사 편집차장을 역임하였다. 6.25남침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임화(林和) 등이 주도하는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에 참여한 혐의로 수복 후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어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 있으면서 《이화 70년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져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1957년에 죽었다. Good Thou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