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좋은 이야기를 올리는 공간
글 수 900
님의 손길
한용운
님의 사랑은 강철(强鐵)을 녹이는 불보다도 뜨거운데
님의 손길은 너무 차서 한도(限度)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서늘한 것도 보고 찬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님의 손길같이 찬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국화 핀 서리 아침에 떨어진 잎새를
울리고 오는 가을바람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감로(甘露)와 같이 청량(淸凉)한
선사(禪師)의 설법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
님의 손길의 온도를 측량할 만한 한란계(寒暖計)는
나의 가슴밖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님의 사랑은 불보다도 뜨거워서 근심산(山)을 태우고
한(恨)바다를 말리는데 님의 손길은 너무도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여름밤이 길어요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더니 개똥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城) 너머로 가서 악마의 웃음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깨어서 일천(一千) 토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는 여름밤이 길어요
쾌 락
님이여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 발자취만큼도 없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북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그림자가 소리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곤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롱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늘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개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 한용운 님은
본명 : 한유천
생애 : 1879년 - 1944년 6월 29일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승려
1937년 항일단체만당사건의 배후자로 피검
1935년 조선일보에 첫 장편 '흑풍'연재
1931년 월간지 '불교' 인수·발간
1927년 경성지회 회장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19년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 선고받고 복역
1913년 불교학원 교원
1908년 원흥사 원종종무원 설립
1905년 인제백담사의 연곡에게서 중이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음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응준(應俊)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 [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