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좋은 이야기를 올리는 공간
봄날 한번 요란하다. 덥다가 춥다가, 비 오다 바람 불다.
나는 잘 있다. 다리 아픈 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기침도 잦아들었다. 석이랑 준이, 큰사위는 잘 있는지. 적적하기는. 밥 달라, 물 달라 귀찮게 구는 남자 없으니 세상이 편하다. 어버이날은 무슨.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자식들 아픈 데 없이 오순도순 서로 보듬고 살면 그것이 젤로 큰 선물이다.
느희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날씨가 어찌나 방정맞던지. 다 늙은 할망구 그리운 서방님 만나러 간다니 꽃들이 시샘을 하더구나. 눈은 어두운데 비까지 내리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돼야 말이지. 요양병원 가는 버스를 반대로 탄 바람에 온 시내를 빙빙 돌다 멀미 나 숨이 깔딱 넘어갈 뻔했다. 비바람에 옴팡 젖어 병실로 들어서는데 이 양반 눈을 질끈 감고 있더구나.
마누라 왔으니 눈 좀 떠보소, 팔을 흔들어도 꼼짝을 않더구나. 2주일 만에 왔다고 토라진 게지. 멀디 먼 병원에 당신 혼자 내박쳐뒀다고 역정이 나신 게야. 나도 바빴지. 자식 손주들 1년내 먹을 된장 담가야 하고, 무더위 닥치기 전 고구마도 심어야 하고. 요즘 열무가 좀 좋으냐. 해서 한 단지 담아 병원에도 좀 가져오느라 늦었다고 싹싹 빌었다.
그 사이 할머니 제사도 있었구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달달 볶아먹던 시어머니인데도 다급하니 빌게 되더라. 목숨처럼 사랑했던 저 아들 벌떡 좀 일으켜 세워주소, 이 화사한 봄날 꽃구경은 한번 하고 떠나게 해주소, 빌고 또 빌었다. 간병인들이야 줄곧 데면데면이지. 내 몸처럼 보살펴주는 사람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 산송장 같은 몸을 앉혔다 눕혔다 먹이고 씻기는 일이 좀 고달프더냐.
그래도 공으로 하는 일 아니니 식기 전에 밥 떠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다정히 건네주면 좋으련만. 그래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라도 자식새끼 종알거리는 집이 젤로 좋다는 거다. 세상 재미 암만 좋아도 조강지처 치마폭이 젤로 정겹고 따숩다는 거다. 내가 무르팍만 성해도 집으로 모셔올 터인데, 그 낯선 곳에 떼놓고 와서는 미안하고 죄스러워 밤에 잠이 안 온다.
괘씸하기야 이루 말할 수 없지. 자식은 셋이나 낳아놓고 농사일은 나 몰라라, 정치 한번 해보겠다며 허구한 날 서울로 부산으로 돌아쳤으니. 마누라는 또 얼마나 구박했누. 무식하다고, 밥상에 온통 군내나는 촌음식뿐이라고. 서울음식엔 금가루라도 뿌린다더냐. 영어 한마디 못하기는 지나 내나 매한가지. 툭하면 농고를 수석으로 나왔다고 자랑하더니 달포 전 장터에서 만난 쌀집 김만중씨가 "그런 일이 있었슈?" 하며 배시시 웃더라.
문자는 곧잘 썼지. 키는 땅딸막해도 반반한 이목구비에 청산유수라 여자들이 좀 끓었더냐. 당장에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또 무식한 여편네 소리 들을까 참고 또 참았지. 유식한 서방님 지청구에 늘그막에 공부란 것도 하게 됐지. 고사성어 몇 개만 알면 오가는 말 알아듣겠다 싶어 나이 오십에 한자교실에 등록했지 뭐냐. 녹슨 머리로 당최 못 따라가겠더니 지성이면 감천이요 고진이면 감래라고, 수험생마냥 밤낮으로 외고 또 외웠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아들 같은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았지.
문리가 트이니 늦공부가 어찌나 재미지던지.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리에 맞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며,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 바늘 만들 듯 어떤 어려운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가르침이 있더냐. 우스개 고사성어도 몇 알려주랴? 인명(人命)은 재처(在妻)요, 순처자(順妻者)는 흥(興)하고 역처자(逆妻者)는 망(亡)하느니, 마누라한테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칼을 받는다는 뜻이란다. 너도 그리 생각하지?
초등학교 들어간 원이가 전화를 했더구나. 대뜸 "할머니, 개떡이 뭐예요?" 묻더라. "개떡은 뭣에 쓰려고?" 했더니 선생님이 "글씨를 개떡같이 쓰면 혼줄을 내주겠다" 했단다. 어린 애가 글씨 좀 개떡같이 쓰면 어때서. 개떡보다 못하고 봄날처럼 변덕스러운 게 우리네 인생인 것을. 병원엔 웬 사내들이 그리도 많은지. 이 악물고 살았든, 농땡이 치고 살았든 한 집안을 이끌었을 가장들이 넋놓고 누워 있으니 가엾고 딱해서 보기가 힘들구나.
어제는 40대 젊은이가 뇌 쇼크로 쓰러져 들어왔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았으면. 최서방한테 잘해라. 남자들은 어리숙해서 작은 충격에도 속절없이 무너지느니. 큰 잘못 아니거든 알아도 모른 척 져주며 살거라. 봄꽃이 처음부터 고왔겠누. 처음부터 달콤한 열매가 어디 있누. 비바람 맞고 나서 더욱 단단히 여무는 것을. 그래 그런가. 미우나 고우나 나는 저 양반 없으면 안 되니 어쩌면 좋으냐. 오늘 밤이라도 훌쩍 떠날까 자다가도 심장이 오그라드니 이를 어쩌냐. 무식한 여편네라 욕해도 좋으니 정신 한번 온전히 돌아와 주었으면. 라일락 향기는 이토록 황홀한데 나의 황혼은 왜 이리 서글픈지. 사랑이 저무니 봄마저 야속하다.
김윤덕 수필
너무 공감이 되는 글이네요.
잘났던지 못났던지 나이 먹으면 다 똑 같은것을.....
모두에게 다가온 황혼은 마음은 젊었는데 몸은 안따라주니
나의 황혼은 왜이리 서글픈지 혼자말로 해보지만
나뿐이 아니라 모두에게 똑 같은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