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좋은 이야기를 올리는 공간

글 수 900
2015.05.09 11:43:39 (*.158.36.241)
3079

모자.jpg

봄날 한번 요란하다. 덥다가 춥다가, 비 오다 바람 불다.

나는 잘 있다. 다리 아픈 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기침도 잦아들었다. 석이랑 준이, 큰사위는 잘 있는지. 적적하기는. 밥 달라, 물 달라 귀찮게 구는 남자 없으니 세상이 편하다. 어버이날은 무슨.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자식들 아픈 데 없이 오순도순 서로 보듬고 살면 그것이 젤로 큰 선물이다.

느희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날씨가 어찌나 방정맞던지. 다 늙은 할망구 그리운 서방님 만나러 간다니 꽃들이 시샘을 하더구나. 눈은 어두운데 비까지 내리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돼야 말이지. 요양병원 가는 버스를 반대로 탄 바람에 온 시내를 빙빙 돌다 멀미 나 숨이 깔딱 넘어갈 뻔했다. 비바람에 옴팡 젖어 병실로 들어서는데 이 양반 눈을 질끈 감고 있더구나.

 

마누라 왔으니 눈 좀 떠보소, 팔을 흔들어도 꼼짝을 않더구나. 2주일 만에 왔다고 토라진 게지. 멀디 먼 병원에 당신 혼자 내박쳐뒀다고 역정이 나신 게야. 나도 바빴지. 자식 손주들 1년내 먹을 된장 담가야 하고, 무더위 닥치기 전 고구마도 심어야 하고. 요즘 열무가 좀 좋으냐. 해서 한 단지 담아 병원에도 좀 가져오느라 늦었다고 싹싹 빌었다.


그 사이 할머니 제사도 있었구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달달 볶아먹던 시어머니인데도 다급하니 빌게 되더라. 목숨처럼 사랑했던 저 아들 벌떡 좀 일으켜 세워주소, 이 화사한 봄날 꽃구경은 한번 하고 떠나게 해주소, 빌고 또 빌었다. 간병인들이야 줄곧 데면데면이지. 내 몸처럼 보살펴주는 사람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 산송장 같은 몸을 앉혔다 눕혔다 먹이고 씻기는 일이 좀 고달프더냐.

 

그래도 공으로 하는 일 아니니 식기 전에 밥 떠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다정히 건네주면 좋으련만. 그래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라도 자식새끼 종알거리는 집이 젤로 좋다는 거다. 세상 재미 암만 좋아도 조강지처 치마폭이 젤로 정겹고 따숩다는 거다. 내가 무르팍만 성해도 집으로 모셔올 터인데, 그 낯선 곳에 떼놓고 와서는 미안하고 죄스러워 밤에 잠이 안 온다.

괘씸하기야 이루 말할 수 없지. 자식은 셋이나 낳아놓고 농사일은 나 몰라라, 정치 한번 해보겠다며 허구한 날 서울로 부산으로 돌아쳤으니. 마누라는 또 얼마나 구박했누. 무식하다고, 밥상에 온통 군내나는 촌음식뿐이라고. 서울음식엔 금가루라도 뿌린다더냐. 영어 한마디 못하기는 지나 내나 매한가지. 툭하면 농고를 수석으로 나왔다고 자랑하더니 달포 전 장터에서 만난 쌀집 김만중씨가 "그런 일이 있었슈?" 하며 배시시 웃더라.

 

문자는 곧잘 썼지. 키는 땅딸막해도 반반한 이목구비에 청산유수라 여자들이 좀 끓었더냐. 당장에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또 무식한 여편네 소리 들을까 참고 또 참았지. 유식한 서방님 지청구에 늘그막에 공부란 것도 하게 됐지. 고사성어 몇 개만 알면 오가는 말 알아듣겠다 싶어 나이 오십에 한자교실에 등록했지 뭐냐. 녹슨 머리로 당최 못 따라가겠더니 지성이면 감천이요 고진이면 감래라고, 수험생마냥 밤낮으로 외고 또 외웠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아들 같은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았지.

 

문리가 트이니 늦공부가 어찌나 재미지던지.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리에 맞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며,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 바늘 만들 듯 어떤 어려운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가르침이 있더냐. 우스개 고사성어도 몇 알려주랴? 인명(人命)은 재처(在妻)요, 순처자(順妻者)는 흥(興)하고 역처자(逆妻者)는 망(亡)하느니, 마누라한테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칼을 받는다는 뜻이란다. 너도 그리 생각하지?

초등학교 들어간 원이가 전화를 했더구나. 대뜸 "할머니, 개떡이 뭐예요?" 묻더라. "개떡은 뭣에 쓰려고?" 했더니 선생님이 "글씨를 개떡같이 쓰면 혼줄을 내주겠다" 했단다. 어린 애가 글씨 좀 개떡같이 쓰면 어때서. 개떡보다 못하고 봄날처럼 변덕스러운 게 우리네 인생인 것을. 병원엔 웬 사내들이 그리도 많은지. 이 악물고 살았든, 농땡이 치고 살았든 한 집안을 이끌었을 가장들이 넋놓고 누워 있으니 가엾고 딱해서 보기가 힘들구나.

 

어제는 40대 젊은이가 뇌 쇼크로 쓰러져 들어왔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았으면. 최서방한테 잘해라. 남자들은 어리숙해서 작은 충격에도 속절없이 무너지느니. 큰 잘못 아니거든 알아도 모른 척 져주며 살거라. 봄꽃이 처음부터 고왔겠누. 처음부터 달콤한 열매가 어디 있누. 비바람 맞고 나서 더욱 단단히 여무는 것을. 그래 그런가. 미우나 고우나 나는 저 양반 없으면 안 되니 어쩌면 좋으냐. 오늘 밤이라도 훌쩍 떠날까 자다가도 심장이 오그라드니 이를 어쩌냐. 무식한 여편네라 욕해도 좋으니 정신 한번 온전히 돌아와 주었으면. 라일락 향기는 이토록 황홀한데 나의 황혼은 왜 이리 서글픈지. 사랑이 저무니 봄마저 야속하다.

김윤덕 수필

댓글
2015.05.10 02:26:09 (*.162.55.134)
하은

너무 공감이 되는 글이네요.

잘났던지 못났던지 나이 먹으면 다 똑 같은것을.....

모두에게 다가온 황혼은 마음은 젊었는데 몸은 안따라주니

나의 황혼은 왜이리 서글픈지 혼자말로 해보지만

나뿐이 아니라 모두에게 똑 같은것 같아요.

댓글
2015.05.10 10:15:24 (*.42.82.55)
말코

어버이 날도 마다하시고 자식들 건강하게

오손도손 살기를 바라는 할망구의 지극한 정성

남편 요양병원에 두고 언능 이르켜달라고 빌고

이런 난중에 집에서 농사짖고 된장담고 할일 다하시는

할멈이 너무나 대견 스럽습니다.

하은님 고맙습니다.

 

댓글
2015.05.10 06:43:36 (*.36.80.227)
고이민현

일자무식 했던 할머니가 한자교실에서 배운 실력으로

이렇게 재미있고 훌륭한 글을 썼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마디 마디마다 우리네가 지나온 역경과 오늘의 현실을

가감없이 그대로 말해주는 할머니의 독백인듯 합니다.

댓글
2015.05.10 10:38:32 (*.42.82.55)
말코

人命은 在妻요 順妻者는 興하고 逆妻者는 亡하느니

마누라한테 순종하면 복을 받고 마음에 거스르면

칼을 맞는다는 뜻으로 요즘 세상에 회자되고 있느니

행복하게 살려거든 스트레스 받지말고 알아도 모르는척하고

져주는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런지요.

댓글
2015.05.11 09:41:13 (*.202.88.136)
오작교

"인명은 재저요 순처자는 흥하고 역처자는 망하느니"

이 말에 적극 동감을 합니다.

그저 처에게 순종하는 것이 무탈하게 오래사는 법이지요. ㅎㅎㅎ

댓글
2015.05.11 20:46:03 (*.177.194.115)
김미소

에효~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우리도 금새 닥칠 일....ㅠㅠㅠㅠㅠ

댓글
2015.05.12 10:05:40 (*.158.35.198)
말코

남과 남이 만나 갈등과 성격차이는 당연지사

부부지간에 서로 적응하지 못하고 심각한 갈등으로

말만하면 같이 소리지르고 싸우고 뒤늦게 황혼이혼을

고민하는 부부가 적지 않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참고 저주는 마음가짐으로 갈등을

해소 하므로서 노년의 삶이 행복해집니다,

참을인자 셋이면 사람도 살린다는데...ㅋㅋㅋ

오작교님 김소미님 고맙습니다.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아버지의 마음 지금도 몰라 (6)
바람과해
2011.10.17
조회 수 3592
조회 수 6597
조회 수 3650
조회 수 3945
조회 수 3208
제일 좋은 나이는 언제? (7)
데보라
2011.09.24
조회 수 3219
아름다운 동행을 위해 (12)
고이민현
2011.09.20
조회 수 3511
어머니...... (7)
데보라
2011.09.04
조회 수 4456
조회 수 4303
사람 잡지 말아요 (9)
데보라
2011.08.26
조회 수 5654
1초 동안 할수 있는 행복한 말 (9)
데보라
2011.08.26
조회 수 5022
뭉개구름/ 박광호
niyee
2011.08.18
조회 수 4973
99세까장 88하게 살려면~~ㅎ (6)
고운초롱
2011.08.06
조회 수 4677
노인 문제 (8)
고이민현
2011.07.25
조회 수 4884
여름비 -詩 김설하 (2)
niyee
2011.07.13
조회 수 5021
자월도에서의 하루 (5)
스카이
2011.07.04
조회 수 5198
조회 수 6525
강화도 가는길... (8)
스카이
2011.06.21
조회 수 5341
기쁨 꽃 / 이해인 (1)
niyee
2011.05.22
조회 수 8315
조회 수 7765
조회 수 8117
세계 최대갑부 록 펠러 이야기 (2)
바람과해
2011.04.04
조회 수 8064
눈물의 축의금 만 삼천원 (3)
바람과해
2011.04.03
조회 수 8133
만원의 행복 (2)
바람과해
2011.03.26
조회 수 7332
아, 지금은 봄 -詩 김설하 (2)
niyee
2011.03.08
조회 수 8219
OZ 204 천사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3)
바람과해
2011.03.05
조회 수 8034
조회 수 5083
거지가 돌려준 것 (1)
바람과해
2011.03.02
조회 수 5759
1달러 11센트로 살 수 있는 것 (4)
바람과해
2011.02.22
조회 수 5324
봄이 오는소리 / 오종순 (3)
niyee
2011.02.18
조회 수 5565
오늘 드디어 꽃샘 바람불다. (1)
누월재
2011.02.16
조회 수 7641
잔잔하고 은은한 사랑 (2)
바람과해
2011.02.14
조회 수 5497
쌓인 피로를 푸시고요~ㅎㅎ (5)
고운초롱
2011.02.08
조회 수 4490
지금쯤 아마도? (2)
고운초롱
2011.02.01
조회 수 4779
부 부 (夫婦)-그대의빈자리-이수진 (1)
바람과해
2011.02.01
조회 수 8749
아름다운 꿈은 생명의 약 (1)
바람과해
2011.01.31
조회 수 5706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물 (1)
데보라
2011.01.29
조회 수 4886
조회 수 4713
꽃보다 더 예쁜 꽃은~ (3)
데보라
2011.01.24
조회 수 5291
조회 수 3864
조그만 관심 (1)
바람과해
2011.01.09
조회 수 4269
조회 수 3449
어느노인의 유언장 -----감동글 (3)
청풍명월
2011.01.05
조회 수 4613
♬♪^. 자유 + 평화 = 희망 (3)
코^ 주부
2010.12.31
조회 수 3248
조회 수 3989
3등칸에 탄 슈바이쳐 박사 (2)
바람과해
2010.12.22
조회 수 2944
조회 수 3617
사랑의 약 판매합니다 (3)
바람과해
2010.12.17
조회 수 3154
*^.^*..좋은 이야기 (1)
데보라
2010.12.14
조회 수 4233
어머니는 영원히 아름답다 (4)
데보라
2010.12.12
조회 수 3167
생선 장수 친구의 행복 메시지 (2)
데보라
2010.12.05
조회 수 3203
아버지~..... (2)
데보라
2010.12.05
조회 수 2866
조회 수 2201
조회 수 3296
조회 수 2798
조회 수 2255
다시 가 보는 단풍 여행 (16)
보리피리
2010.11.20
조회 수 2797
말이란? (3)
누월재
2010.11.18
조회 수 2130
얼굴없는 천사 (4)
누월재
2010.11.17
조회 수 2077
꽃인가, 단풍인가? (25)
보리피리
2010.11.16
조회 수 3073
조회 수 2106
항아리 수제비 (4)
바람과해
2010.11.13
조회 수 2906
[좋은생각]구두 한 켤레 (2)
시내
2010.11.10
조회 수 2727
라면에 얽힌 사연 (3)
바람과해
2010.11.04
조회 수 2723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영원히 하라 (1)
바람과해
2010.11.04
조회 수 2651
조회 수 4502
사랑의 빚을 갚는 법 (1)
바람과해
2010.10.30
조회 수 3796
조회 수 4400
조회 수 415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5)
데보라
2010.10.20
조회 수 3638
하나의 양보가 여덟의 즐거움 (2)
데보라
2010.10.16
조회 수 3372
조회 수 3214
조회 수 3087
코끝 찡한 이야기~... (1)
데보라
2010.10.09
조회 수 3908
조회 수 4223
침묵(沈默)의 위대(偉大)함 (1)
바람과해
2010.09.18
조회 수 5695
조회 수 7320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5)
데보라
2010.09.06
조회 수 4596
현명한 처방 (2)
데보라
2010.08.29
조회 수 3555
잘난 척’이 부른 망신? (5)
데보라
2010.08.29
조회 수 4168
사람은 누워 봐야 안다 (1)
데보라
2010.08.29
조회 수 3891
조회 수 3624
조회 수 4271
우유 한 잔의 치료비 (2)
바람과해
2010.08.25
조회 수 4506
조회 수 3672
조회 수 3642
어머니의 빈자리 (4)
데보라
2010.08.07
조회 수 3572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지혜 (2)
바람과해
2010.07.29
조회 수 3237
조회 수 3126
자전거와 소년 (2)
바람과해
2010.07.16
조회 수 3757
아름다운 용서~ (3)
데보라
2010.07.16
조회 수 3304
영화같은 실화 " 인연 " (2)
데보라
2010.07.13
조회 수 3703
행복을 나누는 시간표 (2)
데보라
2010.07.13
조회 수 3431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