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어떤 종류의 글이라도 제한없이 올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다만 눈쌀이 찌뿌러지는 글이나 미풍양속에 반하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합니다.
  •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그 여자네 집/김용택

빈지게 2479

3

2



그 여자네 집/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집
해가 저무는 날에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 깜박 살아 있는 집
그불 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 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왔다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
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나는 "그여자네집"이 팍팍한 일상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
마 포근하게 쉴 고향의 "집"이었으면 좋겠다.*









신고공유스크랩
2
오작교 2005.05.17. 16:30
언제보아도 서정적이신 김용택 시인님
가까이 계셔서인지 더욱 정감이 갑니다.

좋은 글 오늘도 한 보따리를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빈지게 글쓴이 2005.05.18. 09:01
오작교님! 감사합니다.
언제 읽어도 좋은 시여서 또 올렸답니다.

고운님!
늘 감사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군요.
오늘도 즐거운 시간 열어 가시길 바랍니다.^^*
댓글 등록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우리 홈 게시판 사용 방법 오작교 22.04.26.16:57 174753 0
공지 테이블 매너, 어렵지 않아요 2 오작교 14.12.04.10:33 186630 0
공지 당국이 제시한 개인정보 유출 10가지 점검 사항 4 오작교 14.01.22.17:09 203532 0
공지 알아두면 유익한 생활 상식 7 오작교 13.06.27.09:38 204429 0
73
normal
쟈스민 05.05.18.23:52 2228 +14
72
normal
김남민 05.05.18.15:06 2254 +1
71
normal
빈지게 05.05.18.09:18 2252 +3
70
normal
빈지게 05.05.18.09:02 2293 +1
69
normal
빈지게 05.05.17.10:58 2267 +15
68
normal
빈지게 05.05.17.10:48 2250 +16
normal
빈지게 05.05.17.10:47 2479 +3
66
normal
박임숙 05.05.17.09:24 2239 +6
65
normal
김남민 05.05.16.18:00 2256 +6
64
normal
빈지게 05.05.16.09:15 2530 +5
63
normal
빈지게 05.05.16.08:54 2271 +1
62
normal
빈지게 05.05.14.09:01 2286 +14
61
normal
빈지게 05.05.14.08:57 2360 +1
60
normal
청하 05.05.13.22:21 2222 +4
59
normal
개암 05.05.13.19:32 2264 +13
58
normal
빈지게 05.05.13.09:15 2259 +11
57
normal
빈지게 05.05.13.09:10 2269 +12
56
normal
박임숙 05.05.13.08:01 2233 +2
55
normal
김남민 05.05.12.21:45 2212 +1
54
normal
빈지게 05.05.12.08:42 227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