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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동그라미(주제)
바닷가에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오늘따라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는 소년의 곁을 떠난 지 벌써 이태째였다.
가끔 찾아오겠다던 약속과는
달리 엄마는 소년을 찾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어느새 그리움과
기다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년은 엄마 아빠가 헤어지던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은 봄방학이 끝나던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부터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엄마 아빠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엄마가 울먹이는
전화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는 오늘 법원에 가서 법적으로 헤어졌단다.
넌 이제 아빠하고 살아라.」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선을 그었다.
계속 선을 그으면 그 선이 닿는 곳에
엄마가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계속 선을 그었다.
파도가 달려와 선을 없애면
다시 그 자리에 선을 그었다.
어느새 밤은 깊었다.
보름달이 해변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모래 위에 선을 긋는 일을 잠시
멈추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빙그레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보름달이 동그스름한 엄마의 얼굴 같았다.
소년은 보름달 같은 엄마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소년은 동그라미를 그릴 줄 몰랐다.
보름달처럼 둥근 원을 그리고 싶어하면서도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계속 직선만 그었다.
그때 소년의 등뒤로 가만히 다가서는
발소리가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였다.
「얘야, 동그라미를 그리려면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야.」
소년은 아빠의 말대로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가면서 선을 그었다.
그러자 보름달처럼 둥근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때 소년의 아버지는 나직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들이 바닷가에 손가락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면서
「아, 사랑도 이런 것이구나.
처음 사랑하던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야
진정 사랑의 원을 그릴 수 있구나.
사랑하던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아야,
처음과 끝이 서로 같이 만나야
진정 사랑을 완성할 수 있구나.」
--정호승 시인의 수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