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글 수 4,852
오작교
2007.11.09 00:03:18 (*.204.44.1)
1082
1 / 0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유령(幽靈)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어져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속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박정대
댓글
2007.11.09 00:15:19 (*.204.44.1)
오작교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유령(幽靈)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그 술잔에 무얼 부어서 마실까나......
댓글
2007.11.09 21:43:06 (*.202.154.153)
Ador
이하의 "장진주"를 먼저 찾아 보아야겠군요~
출전에 앞서 고운님에게 작별하는 시인지......

불별의 사랑이지 못하여 미안하다는 말,
가슴을 에이는군요......

좋은 글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공지 우리 홈 게시판 사용 방법 file
오작교
2022-04-26 100154  
공지 테이블 매너, 어렵지 않아요 2 file
오작교
2014-12-04 111302  
공지 당국이 제시한 개인정보 유출 10가지 점검 사항 4 file
오작교
2014-01-22 128072  
공지 알아두면 유익한 생활 상식 7
오작교
2013-06-27 128689  
3312 어떤 맛이 담백한 맛 인가요? 9
윤상철
2008-07-15 1238 5
3311 접시꽃 / 손정민 8
그림자
2008-07-14 1406 3
3310 ♡사랑해도 괜찮을사람♡ 6
레몬트리
2008-07-14 1107 5
3309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 2
개똥벌레
2008-07-14 1014 3
3308 가는 세월아 14
들꽃향기
2008-07-12 1344 2
3307 길 / 김현영 20
그림자
2008-07-11 1329 11
3306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가지만 18
고이민현
2008-07-11 1128 9
3305 안되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포기하는것이 실패다 8
저비스
2008-07-11 1202 6
3304 [自祝] 드디어 오늘 "회원 출석 포인트 랭킹"에 등재 12
농부
2008-07-10 1348 8
3303 Lake Tahoe / 여름 20
감로성
2008-07-10 1631 20
3302 무척이나 더우시죠? 3
새매기뜰
2008-07-09 1355 6
3301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일까?? 16 file
빈지게
2008-07-09 1339 4
3300 ♡인연과사랑♡ 6
레몬트리
2008-07-08 1106 5
3299 초여름 아침풍경 14
들꽃향기
2008-07-08 1061 4
3298 타오르는 불씨/시현 20
cosmos
2008-07-07 1393 13
3297 정겨운 노치샘 풍경 7 file
빈지게
2008-07-07 1063 4
3296 사랑 하는 까닭 3
개똥벌레
2008-07-07 1207 8
3295 살맛 나는 세상 18
고이민현
2008-07-07 1218 5
3294 사랑과 영혼 ㅡ 420년전 편지 6
쉼표
2008-07-06 1085 5
3293 회상_1 11
반글라
2008-07-06 1403 14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