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글 수 4,852
2009.08.21 09:02:57 (*.45.107.26)
1120
6 / 0

어떤 노파의 사랑 / 우먼

관음사는 관음보살님을 모시는 작은 절이다. 관음사를 막 나오면 정자가 있다. 아파트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네 시경. 동네 할머니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다. 마실 나온 할머니들이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다. 할머니 수만큼 쭈쭈바를 샀다. 쭈쭈바를 드리면서 “ 영강님이라고 생각허고 맛나게 드셔요!”
우리 일행의 능청맞은 말에 호호 할머니들의 틀니가 들썩거린다.

할머니 한 분이 그물눈을 만지고 있다.
“쭈쭈바 잡수고 하세요.”
“천성이 군것질을 안하는구먼요.”
“다른 할머니들은 다 노는데, 뭐 하러 그렇게 열심이래요.”
“죽으면 맨 날 쉴 것인디, 쪼매라도 힘 있을 때 해야지 놀먼 뭐허겄어요”
“자식들 없어요?”
“아들이 배 부리는디, 이것도 꽃게잡이 그물이구먼요. 터진 것은 띠어내고 성한 것은 이서서 다시 쓰는구먼요. 이렇게 하나 엮으면 삼만원인디, 심심찮게 돈벌이도 돼요. 아들 내외가 뭐가 필요 할까, 내가 뭘 도와줘야 하나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았구먼요. 긍께 아들내외는 우리엄니가 최고라고 지금까지는 말 허요.

노인들 일 안하고 놀먼 바로 불행이구먼요. 내 주위에서도 많이 봤구먼요, 주눅 들어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은 편히 살려다보니 그렇게 된 거여. 내 며느리들은 효부지. 아직까진 시어밀 인정 허니께. 아들 때문에 속상한일 있으면 내가 시에미인데도 조잘조잘 다 일러요. 며느리편이 되어주면 불란(不亂) 일어날 일도 없고........ 동서 간에 흉을 보믄 그냥 다 들어 주고 입 꼭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지.”

“다른 집은 고부간 갈등이 심해 죽느니 사느니 헌다는데 할머니는, 참 지혜로우시네요. 비결이 따로 있나 봐요?”
“비결이랄 것이 뭐 있겄어. 나는 며느리 셋을 손주 날 때마다 해부간을 다 했줬구먼. 석 달 동안 꼬박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했어. 그러니 며느리들이 친정엄마보다 더 좋다고 혀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정을 듬뿍 주고 나믄, 반드시 똑같이 되돌아오는구먼요. 그라고 내도 시에미니께 미운 일 있으면 좀 참았다가 좀 더 늙어 들을 수 없을 때, 나 보는데서 말고 실컷 욕하라고 허는구먼요. 그러면 며늘애들이 피식 웃고 말지요.”

“할머닌 참 보살이네요”
“아이고 뭔 말은 그렇게 허신다요. 시상 살믄서 느낀 것 뿐인디.”
“할머닌 몇 살까지 살고 싶으세요?”
“나이 80, 이쪽저쪽 해서 죽어야 헛고생 아니구먼. 더 살믄 그때부터 헛고생이여! 인자 나도 얼마 안 남았어.”

쭈쭈바 하나 먹고 나서도 한참이나 정자 그늘 밑에서 할머니 사는 철학을 듣고 있자니 부처가 따로 없다. 속이 비어 가는 쭈쭈바를 붙잡은 할머니들의 손등에 저녁노을이 곱다.
댓글
2009.08.21 09:08:51 (*.45.107.26)
우먼
불볕 더위가 한꺼풀 꺽이고 있네요.

가당치 않은 신종플루가 고개든지 한참인데
아직도 기세등등 하니
건강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홈가족님들의 행복한 하루를 기원합니다.
댓글
2009.08.21 09:51:20 (*.214.0.171)
알베르또
근래에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 글을
읽어 본 적이 없네요. 어떻게 사투리까지
그렇게 실감나게 옮겼을까?
참 교훈적인 글입니다.
느끼고도 실천을 못하니 그게 인간이지요.
댓글
2009.08.21 21:18:40 (*.81.128.122)
물소리
고운글에 살포시 머물다 갑니다 ^*
번호
제목
글쓴이
공지 우리 홈 게시판 사용 방법 file
오작교
78930   2022-04-26 2022-04-26 17:00
공지 테이블 매너, 어렵지 않아요 2 file
오작교
89763   2014-12-04 2021-02-04 13:44
공지 당국이 제시한 개인정보 유출 10가지 점검 사항 4 file
오작교
106464   2014-01-22 2021-02-04 13:58
공지 알아두면 유익한 생활 상식 7
오작교
107159   2013-06-27 2015-07-12 17:04
3812 인터넷 용어 - 제대로 알고 씁시다.(펌) 16
오작교
19891 877 2007-08-12 2012-02-15 09:21
 
3811 추석명절 잘보내세요
들꽃향기
1198 1 2009-10-02 2009-10-02 20:09
 
3810 추석 1
백합
1054 1 2009-10-02 2009-10-02 00:56
 
3809 우리동네 맷돼지 사건
송내안골
1540 1 2009-09-30 2009-09-30 17:07
 
3808 * 건강하게 늙어가기 4
Ador
1277 2 2009-09-29 2009-11-04 20:10
 
3807 * 중국 정주와 서안 관광기 (펌) 7
Ador
1391 3 2009-09-24 2009-09-24 23:29
 
3806 어둠이 깔리면 암흑천지인 우리마을 5
송내안골
1337 1 2009-09-23 2009-09-23 02:20
 
3805 가을 전어 드세요 4
새매기뜰
2813   2009-09-20 2009-10-19 13:06
 
3804 우리는 마음의 친구 6
말코
1376   2009-09-20 2009-09-20 12:15
 
3803 가슴에 남는글 3
장길산
1389 2 2009-09-17 2009-09-17 10:23
 
3802 당신은 놓치기 싫은 인연입니다 1
장길산
1287 7 2009-09-05 2009-09-05 19:58
 
3801 * 타미플루 특허, 강제 실시를 주저하는 정부..... 1
Ador
1178 11 2009-09-02 2009-09-02 23:46
 
3800 마음에 부자가 따로 있나요 2
송내안골
1299 8 2009-09-01 2009-09-01 23:22
 
3799 내가사는 시골 마을의 하루 5
송내안골
1335 11 2009-08-30 2009-08-30 00:23
 
3798 * 가을이 어느새 성큼 다가오고 있다 2
송내안골
1189 6 2009-08-28 2009-08-28 23:48
 
3797 ◇인도야화◇ 생과 사가 만나는 강 7
오미숙
1379 16 2009-08-26 2013-03-12 22:53
 
3796 그때 그시절 4
물소리
1340 9 2009-08-22 2009-08-22 23:04
 
3795 아주 요긴한 생활정보 5
별빛사이
1323 12 2009-08-21 2009-08-21 20:45
 
어떤 노파의 사랑 3
우먼
1120 6 2009-08-21 2009-08-21 09:02
어떤 노파의 사랑 / 우먼 관음사는 관음보살님을 모시는 작은 절이다. 관음사를 막 나오면 정자가 있다. 아파트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네 시경. 동네 할머니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다. 마실 나온 할머니들이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다. 할머니 수만큼...  
3793 큰 별이 지다!(謹弔) 3
새매기뜰
1201 11 2009-08-19 2009-08-19 16:18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