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글 수 4,852
2014.01.09 21:30:56 (*.101.18.47)
1774

어느 남편의 일기

결혼 8년차에 접어드는 남자입니다.
저는 한 3년 전쯤에 이혼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
그 심적 고통이야 경험하지 않으면
말로 못하죠. 저의 경우는 딱히
큰 원인은 없었고 주로 아내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더군요.
저도 회사생활과 집안 일로 지쳐있던 때라
맞받아쳤고요.

순식간에 각방 쓰고 말도 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 갔고요.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암묵적으로 이혼의
타이밍만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도 눈치가 있는지
언제부턴가 시무룩해지고, 짜증도
잘 내고 잘 울고 그러더군요.
그런 아이를 보면 아내는
더 화를 불같이 내더군요.
계속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이가 그러는 것이 우리 부부 때문에
그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가끔 외박도 했네요.
그런데 바가지 긁을 때가 좋은 거라고
저에 대해 정내미가 떨어졌는지
외박하고 들어가도 신경도 안 쓰더군요.

아무튼 아시겠지만
뱀이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듯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러기를 몇 달,
하루는 퇴근길에 어떤 과일 아주머니가
떨이라고 하면서 귤을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에 다 사서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주방 탁자에 올려놓고 욕실로
바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아내가
내가 사온 귤을 까먹고 있더군요.

몇 개를 까먹더니
"귤이 참 맛있네.”
하며 방으로 쏙 들어가더군요.

순간 제 머리를 쾅 치듯이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아내는 결혼 전부터
귤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하고,
결혼 후 8년 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 번도 사 들고 들어간 적이 없었던 거죠.
알고는 있었지만 미쳐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뭔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예전 연애할 때 길 가다가 아내는
귤 좌판상이 보이면 꼭 천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던 기억이 나더군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져서
내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답니다.

시골집에 어쩌다 갈 때는
귤을 박스채로 사들고 가는 내가
아내에게는 8년간이나 몇 백원 안하는
귤 한 개 사주지 못했다니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 후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았죠.
아이 문제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말이죠.

반면 아내는 나를 위해 철마다 보약에
반찬 한 가지를 만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신경 많이 써 줬는데 말이죠.

그 며칠 후에도
늦은 퇴근길에 보니 그 과일
좌판상 아주머니가 보이더군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샀습니다.

저도 오다가 하나 까먹어 보았구요.
며칠 전 아내 말대로 정말 맛있더군요.
그리고 살짝 주방탁자에 올려놓았죠.

마찬가지로 씻고 나오는데
아내는 이미 몇 개 까먹었나 봅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않던 아내가

“이 귤 어디서 샀어요?”
“응 전철 입구 근처 좌판에서”
“귤이 참 맛있네.”

몇 달 만에 아내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도
몇 알 입에 넣어 주구요.
그리고 직접 까서 아이 시켜서
저한테도 건네주는 아내를 보면서
식탁 위에 무심히 귤을 던져놓은
내 모습과 또 한 번 비교하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뭔가 잃어버린 걸 찾은 듯
집안에 온기가 생겨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아내가 주방에 나와 아침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보통 제가 아침 일찍 출근하느라
사이가 안 좋아진 후로는 아침을 해 준적이
없었는데, 그냥 갈려고 하는데, 아내가
날 붙잡더군요.
한 술만 뜨고 가라구요.

마지못해 첫 술을 뜨는데,
목이 메여 밥이 도저히 안 넘어 가더군요.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다는
한마디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부끄러웠다고 할까요.
아내는 그렇게 작은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일에도 감동받아
내게로 기대올 수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정말 바보 중에 바보가
아니었나 싶은 게

댓글
2014.01.10 17:18:14 (*.51.26.24)
尹敏淑

늦게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행복은 작은것에 있는걸

남자분들이 잘 모르죠.ㅎ~

댓글
2014.01.10 21:17:51 (*.101.18.15)
청풍명월

윤작가님 바쁘신데 찾아 주셔서 감명깊게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공지 우리 홈 게시판 사용 방법 file
오작교
71017   2022-04-26 2022-04-26 17:00
공지 테이블 매너, 어렵지 않아요 2 file
오작교
81784   2014-12-04 2021-02-04 13:44
공지 당국이 제시한 개인정보 유출 10가지 점검 사항 4 file
오작교
98506   2014-01-22 2021-02-04 13:58
공지 알아두면 유익한 생활 상식 7
오작교
99064   2013-06-27 2015-07-12 17:04
4572 세상에 보기드문 마음이 넓은 시어머니 2
청풍명월
1872   2014-01-13 2014-01-13 21:32
 
4571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2
청풍명월
1829   2014-01-13 2014-01-13 21:29
 
4570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윤숙 1
청풍명월
1910   2014-01-12 2014-01-14 21:51
 
4569 세계 아이큐 1위 한국인 1
바람과해
2070   2014-01-12 2015-10-20 22:33
 
4568 새해 희망 열여섯 메세지 2
청풍명월
1893   2014-01-11 2015-10-20 22:33
 
4567 고독을 위한 의자----이해인 2
청풍명월
1845   2014-01-11 2014-01-12 21:19
 
4566 인연의 잎사귀 ------이해인 1
청풍명월
2006   2014-01-11 2014-01-14 21:38
 
어느 남편의 일기 2
청풍명월
1774   2014-01-09 2014-01-10 21:17
어느 남편의 일기 결혼 8년차에 접어드는 남자입니다. 저는 한 3년 전쯤에 이혼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 그 심적 고통이야 경험하지 않으면 말로 못하죠. 저의 경우는 딱히 큰 원인은 없었고 주로 아내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더군...  
4564 여운이 있는 좋은 사람 1
청풍명월
1798   2014-01-09 2014-01-11 17:44
 
4563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가지만 1
청풍명월
1729   2014-01-08 2014-01-11 17:38
 
4562 아들에게 쓴 어느 어머니의 글 6 file
청풍명월
2050   2014-01-07 2015-10-20 22:32
 
4561 CNN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10가지" 선정
바람과해
1869   2014-01-07 2014-01-07 11:04
 
4560 할머니와 어린이의 감동 이야기 1
청풍명월
1766   2014-01-06 2014-01-09 21:13
 
4559 소크라테스의 악처 1
청풍명월
1785   2014-01-06 2014-01-09 11:29
 
4558 --어느 도둑 이야기--- 1
청풍명월
1664   2014-01-06 2015-10-20 22:33
 
4557 還鄕/休靜(西山大師) 2
고이민현
2091   2014-01-06 2014-01-11 09:54
 
4556 2014년 새해 덕담 메일 1
청풍명월
1779   2014-01-06 2015-10-20 22:33
 
4555 아직도 알 수 없는 아버지 마음 2
바람과해
1777   2014-01-05 2014-01-06 12:49
 
4554 우리는 참좋은 만남 입니다 1
청풍명월
1837   2014-01-05 2014-01-06 16:46
 
4553 좋은 인연 아름다운 삶 1
청풍명월
1767   2014-01-05 2014-01-06 16:38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