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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을 주는 사람이 되자!

오작교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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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t that we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d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한 만큼 위로받으려고 하지 말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는 만큼 이해받으려고 하지 말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 of Assisi)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우리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더 행복해진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Book.gif내가 필요로 할 때 사람들은 나에게 위안을 주고 나를 이해해 주었어.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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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혜안나 2016.03.23. 17:34

'평화의 기도'(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녁 프란치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치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수혜안나 2016.03.23. 17:55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를 훑다보면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만난다.
하나는‘성 베네딕도(480~547)’이고, 또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다.

베네딕도는 서양 수도원에 주춧돌을 놓았고,
프란치스코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에 영적 나침반을 제시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프란치스코’란 이름 하나만으로 세계적인 순례지이자, 여행지가 됐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정교(政敎)유착의 특권을 향유하며
총체적으로 탈복음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을 때,
1207년 청년 프란치스코는 허물어져가던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밑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교회를 다시 지어라"

 

그는 이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어 맨손으로 흙과 돌을 들어 나르며 성당을 보수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중세 교회를 위한 ‘세기적’ 명령이었다.
이를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탁발 수도회를 창설하여 위대한 개혁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가 표방한 것은 복음으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사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세 가지 병폐인 부, 권력, 사치에 대한 명처방이었다.

그 파급력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무력 혁명도 아니요,
센세이셔널한 사상으로 새 시대를 연 이데올로기 혁명도 아닌,
그저 소박한 실천운동이었지만 세기를 거듭할수록
파장은 기하급수적으로 거세어져 갔다.

 

성 프란치스코는 ‘개혁’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쇄신의 단초를 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 형제들을 동지로 얻었고, 숱한 추종자들을 협력자로 얻었다.

 

‘제2의 예수’라 불렸을 만큼 존경 받는 성 프란치스코가 일으킨 운동의 여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증폭되면서 중세 가톨릭을 제자리로 돌려 놓게 되었다.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는
프란체스코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수녀의 유해가 있었다.
성녀 클라라는 아시시의 귀족 집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란치스코를 따랐다.

11살 아래였던 클라라 수녀는 프란치스코에겐
친구이자, 누이이자, 함께 영성의 길을 가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수혜안나 2016.03.23. 18:11


성당 안의 조그만 정원에는 장미가 있다.
그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아무리 봐도 가시는 보이지 않았다.

안내하는 사람이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여성에 대한 욕정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이 근처에 있는 장미덩굴 위에 자신의 몸을 굴렸습니다. 
가시가 몸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는 욕정을 극복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장미 가시 위에서 뒹굴자 하늘이 장미의 가시를 없앴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대단히 인간적이다.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치스코도 
욕망 앞에서 고민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다시 싸우고 하는 과정을 거듭했다는 말이다.

짐승과 새들과도 말을 나눌 수 있었다는 청빈의 상징 성 프란치스코,
무소유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그의 수도회는 
중세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2년 전에 그는 동굴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몸에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으로 찔렀던 옆구리의 상처를 말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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