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김의균
헌 옷 버리듯 헌 파일도 버려야
"유럽 여행에서 가장 고대했던 순간이 파리 에펠탑 야경을 보는 거였어요. 오후 8시 정각에 조명이 켜지면 에펠탑이 반짝거리는데 그 멋진 장면을 보면서 전 사진 지우느라 바빴어요. 하필 그때 딱 스마트폰 용량이 차서…."
지난 유럽 여행을 회상하던 대학생 김봄(23)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행 가기 전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과 애플리케이션을 정리해야지 생각했지만 미뤄뒀던 게 화근이었다. "미리 정리해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 스마트한 기계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실감했어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외장하드에 사진을 옮기고 필요 없는 사진, 애플리케이션은 바로 지워요."
지워야지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미루기만 하다간 김씨처럼 필요한 순간 난감한 상황을 겪을 수 있다. 디지털 대청소의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은 또 있다. 서울 행당동에 사는 임수정(31)씨는 얼마 전 어린이집에 보낼 딸아이 사진을 찾다가 반나절을 꼬박 보냈다. "작년 봄 벚꽃 폈을 때 여의도한강공원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걸 찾느라 데스크톱에 있는 폴더란 폴더는 다 열어 사진 수천 장을 뒤졌어요. 날짜나 폴더명만 잘 표시했어도 금방 찾았을 텐데 시간 낭비 많이 했죠." 파일을 백업해두더라도 시간, 장소별로 정리하지 않으면 필요한 파일 찾기가 쉽지 않다.
정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자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쓰지 않는 가구나 입지 않는 헌 옷을 버리듯 쓰지 않는 헌 파일은 버리고 치워야 한다.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면 체계적으로 정리정돈해 찾아 쓰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friday 설문 결과 디지털 대청소가 가장 필요한 건 사진(36.6%)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애플리케이션(23.9%), 동영상(15%), 프로그램(14.4%), 문서(10.1%) 순으로 답했다.
뚝딱 찍어 뒤죽박죽…기록 포화 시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왜 사람들은 파일들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걸까? '디지털 파일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응답자들은 '귀찮고 복잡하게 느껴져서'(36.4%), '지우는 게 아까워서'(22.5%), '나중에 언제든 꺼내 볼 거라서'(20.1%), '정리 방법을 잘 몰라서'(15.6%), '정리의 필요성을 잘 못 느껴서(5.4%)'라고 답했다.
경남 진해에서 나은(4)·도하(2) 남매를 키우는 워킹맘 이현희(35)씨는 최근 스마트폰을 대용량으로 바꿨다. "매일 애들 사진을 찍는데 도저히 정리할 엄두가 나질 않아 스마트폰 용량을 늘렸어요. 128GB가 다 차면 그땐 어떡해야 하나 벌써 두렵네요." 사진 정리를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24시간이 모자라는 워킹맘에겐 사진을 선별하고 클라우드나 외장하드에 옮기는 일도 시간을 꽤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매일 스마트폰으로 찍는 아이 사진, 멋지게 차려입은 날 찍는 셀카, 맛집 찾아 찍는 인증샷까지 스마트폰엔 사진이 쌓여간다. 쉽게 찍고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의 장점이 '기록의 포화'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인천 송도에 사는 직장인 태철훈(34)씨는 "사진이 흔해져서인지 의미가 예전 같지 않다"며 "굳이 자주 꺼내 보지도 않으니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사진만이 아니다. 스마트폰에 깔린 수많은 애플리케이션부터 다운로드받은 음원 파일이 수두룩하다. 노트북이나 데스크톱은 어떠한가. 업무상 문서 파일이며 자료 파일이 한가득이다. 미세 먼지 쌓이듯 눈 깜짝할 사이 쌓이는 디지털 파일은 용량을 키우며 기계를 압박해온다. 스마트한 기계를 스마트하게 쓰지 못하는 디지털 시대의 역설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집 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 느끼는 불편과 달리 디지털 파일은 많이 쌓여도 당장 직접적인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며 "그러나 삭제하면 영원히 사라질 거라는 불안감이 정리를 계속 망설이게 한다"고 했다.
매일 사진 찍고 새 파일 저장하기도 바쁘다. 이전 파일을 정리할 짬이 없다. 그러나 디지털 파일의 특성상 한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상황도 벌어진다. "사람들은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며 불안함을 애써 회피하려고 해요. 주기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두고 기존 것들을 지워나가는 습관을 만들어야 해요. 정리는 습관입니다."
미뤘다 후회 백 배, 바로바로 비우라
"미니멀리즘 열풍을 보면서 디지털 파일부터 버리고 비우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직장인 최대성(40)씨는 매일 출근 후 10분씩 메일함부터 스마트폰, 노트북에서 필요 없는 파일을 비워낸다. 꼭 저장해야 할 파일은 네이버클라우드에 날짜별로 저장한다. 지우기 애매한 파일은 임시파일함에 모아둔 뒤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필요 없으면 삭제한다. 텅 빈 메일함은 새 메일이나 중요 메일을 확인하기 쉽고 디지털 기기에선 사진이나 문서 찾기도 간단해졌다. "정작 중요한 파일은 일부더라고요. 비우고 버리니 업무나 생활이 훨씬 쾌적해집니다."
버리고 지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디지털 파일 관리의 핵심은 백업(backup·데이터 보존이나 사고에 대비해 미리 자료를 복사해두는 것)이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는 시간강사 김세진(36)씨의 컴퓨터엔 하드디스크가 5개다. 외장하드도 백업용까지 2개다. 강의용 사진 자료부터 논문까지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나눠 정리하기 위한 김씨만의 방법이다. "보고서 제출 2주 전에 파일이 전부 지워진 끔찍한 기억이 있어요. 그 뒤로는 나눠서 백업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파일 정리는 각 디스크별로 연도, 날짜별로, 다시 주제별, 파일 종류별로 재분류한다. 파일 정리는 저장 즉시 백업까지 해버린다. "누군가는 병적이라고도 하지만 저에겐 중요한 자료이다 보니 저만의 방식대로 정리하는 원칙을 만든 거죠."
전문가들도 백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데이터복구 전문업체 바른데이터의 안현규(30) 대표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외장하드 등의 데이터는 기술적으로 복원할 수 있지만 복원할 수 없는 데이터도 있다"며 "주기적으로 백업하고 외장하드나 USB 등을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HDD(hard disk drive), SSD(solid state drive) 등 저장장치는 점차 대용량화, 소형화, 저렴해지는 추세다. 외장하드가 아니라도 구글드라이브나 네이버클라우드 등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해 따로 저장을 생활화할 필요가 있다.
박재윤씨가 만든 포토북. 여행 다녀와서 중요한 이미지만 골라 만드는 포토북은 사진 정리·보관에 유용한 디지털 대청소법 중 하나다. / 박재윤
디지털 파일을 정리하는 아날로그적 방법도 있다. 서울 잠실본동에 사는 박재윤(32)씨는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바로 포토북을 만든다. "외장하드에 사진을 모아놓긴 했는데 사진이 워낙 많다 보니 보고 싶을 때 테마별로 보기 힘들더라고요. 사진은 다시 보려고 찍는 건데 이렇게 하면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기도 좋아요." 서유럽 일주, 미국 샌프란시스코 여행 추억을 한 페이지씩 넘기다 보면 삶의 활력도 살아난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디지털 대청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당장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흔들린 사진, 비슷한 사진부터 지워보자. 주기적으로 청소 기간을 정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번 주말 봄맞이 디지털 대청소 해보는 건 어떨까.
출처 : Web
저도 당장 청소해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