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들어와 내게 주어진 최초의 소임은 부목(負木)이었다. 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인 셈이다. 이 소임은 행자 시절 은사께서 내게 내린 출세간의 선물이기도 하다. 당신도 절에서 맨 처음 본 소임이 부목이라고 하셨다.
1950년대 통영 미륵산에 있는 미래사는 집이 두 채뿐인 지극히 조촐한 선원이었다. 대중은 많을 때가 고작 7, 8명. 아궁이가 셋이었는데, 하루 두 짐씩 땔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이 부목의 소임이었다. 지게질이 서툴러 몇 번씩 넘어지면서 일머리를 조금씩 익혀 갔다.
장마철이면 아궁이에 물이 스며들어 불을 지피는 데 아주 애를 먹었다. 이 무슨 인연인지 나는 가는 데마다 장마철이면 이 ‘수세식 아궁이’ 때문에 적잖이 속을 썩인다.
산중에서는 연일 비가 내리면 생수가 터져 낮은 곳에 물이 고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중에 집을 지을 때는, 더구나 옛터에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터를 돋워 지어야 한다. 터를 깎아 내면 백발백중 어김없이 물이 스며든다. 평지보다 아궁이가 깊고 구들장 밑의 개자리가 깊어야 제대로 불이 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집터를 고를 때는 절대로 깎아 내서는 안 된다.
경험이 없어 일꾼들 하는 대로 맡겨 두었더니 불일암 시절 첫 장마부터 아궁이에 물이 고였다. 그대로 두면 구들장 밑까지 물이 차오를까 봐 밤잠을 설치면서 물을 퍼내기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의 압력으로 어떤 경계에 이르면 그 이상은 물이 차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차오를 만큼 차오르도록 방치해 두었다.
한 이틀 지나 아궁이의 물이 빠지면 먼저 고무래로 젖은 재를 쳐내야 한다. 아궁이 속에 물기가 배어 있으면 새로 불을 지피기가 어렵다. 이런 때는 바닥에 마른 장작을 깔고 그 위에 땔감을 두고 불을 지펴야 하는데, 부채질을 한참 해야 겨우 불이 붙는다.
요즘은 큰 절, 작은 절 가릴 것 없이 대부분 기름보일러를 쓰기 때문에 이런 원시적인 헛수고는 ‘해당사항 무’이겠지만 혹시 나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신참들을 위해 이와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중노릇이란 어떤 것인가? 하루 스물네 시간 그가 하는 일이 곧 중노릇이다. 일에서 이치를 익히고 그 이치로써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간다. 순간순간 그가 하는 일이 곧 그의 삶이고 수행이고 정진이다.
지난 물난리 때에도 나는 아궁이 앞에서 반세기 넘게 이어 온 나무꾼의 소임을 거르지 않았다. 누가 중노릇을 한가한 신선놀음이라 했는가.
사람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상황이 있다. 남과 같지 않은 그 상황이 곧 그의 삶의 몫이고 또한 과제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업이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다. 할 일 없이 지내는 것은 뜻있는 삶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를 일으켜 세운다.
처서(處暑)를 지나면서 하루걸러 다시 군불을 지핀다. 훨훨 타오르는 아궁이 앞에서 내 삶의 자취를 되돌아본다. 늦더위의 뙤약볕에 청청하던 숲이 많이 바랬다. 초가을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기기 시작한다.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도 기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