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에 가면
도서명 | 아름다운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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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면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인데 오늘 이 산중에는 첫눈이 내렸다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겨울이 성급하게 다가서는가. 오늘 내린 눈으로 뜰가는 온통 단풍나무 잎으로 낙엽의 사태를 이루었다.
요 며칠 동안 청명한 가을 날씨 덕에 남쪽에 내려가 오랜만에 조계산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마중했다. 산마루로 조심조심 얼굴을 내미는 월광보살 앞에 우리는 합장하면 마음에 담긴 소원들을 빌었다. 해와 달 같은 천지신명 앞에 손을 모아 소원을 비는 일은 누가 시키거나 가르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렇게 하고 싶은 원초적인 순수한 신앙심에서다. 이 원초적인 순수한 신앙심이 종교에 귀의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종교의 교리나 이론은 이 원초적인 순수한 신앙심에 견주면 공허하고 관념적이다. 신학자나 종교학자 들의 신앙심이 그 순수성에서 일반 신자들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는 말이나 이론에 있지 않고 일상적인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달님 앞에 마주 서서 저마다 소원을 비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날 하루의 삶이 달빛에 물들어 은은히 빛나는 것 같았다. 나무 월광보살!
나선 김에 운문사에 가서 말빚을 갚고 왔다. 이따금 들르는 도량인데 갈 때마다 옛 절의 맑고 아늑함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특히 운문사에는 지나온 세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세 분’이 계셔서 나그네의 발길을 이끈다.
수백 년 된 두 그루 은행나무가 가지런히 서서 허공을 떠받치듯 우람하게 서 있다. 그 당당한 기상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평생 청정한 수행을 쌓아 가면 이런 당당한 기상을 지니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노거수(老巨樹)는 이 도량에 몸담아 수행하는 사람들을 낱낱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나무 안에는 이 도량의 지나온 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우리 귀가 열린다면 그 은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운문사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만세루 곁에 청청하게 살아 계시는 나이 4백 살이 넘는 소나무 한 그루를 친견할 수 있다. 이 소나무는 세월의 풍상에 꺾임이 없이 영원한 젊음을 내뿜고 있다. 동구에 있는 다른 소나무들은 가지마다 가을을 그 잎에 달고 있는데 이 소나무만은 전혀 계절의 바람에 동요됨이 없이 청청하고 청청할 뿐이다. ‘영원한 젊은’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4백 살의 젊음 앞에 숙연해진다. 이 소나무를 두고 사람들은 가지가 쳐졌다고 해서 ‘처ㅓ진 소나무’라 하고, 키는 작고 가지가 가로 뻗어 옆으로 퍼졌다고 해서 반송(盤松)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소나무는 오래 살다 보니 그 도량에서 수행하는 효성스런 사람들한테서 한 해에 막걸리 열두 말씩을 공양 받는다. 주량이 대단하다. 그런 주량의 영향 덕인지 감기 몸살 한 번 치르지 않고 오늘처럼 저렇게 정정하시다. 그래서 주송(酒松)이란 별명도 얻게 되었다.
나는 운문사에 들를 때마다 맨 먼저 비로전 부처님께 문안인사를 드린다. 일반 불상의 전형에서 벗어난 그분만의 독특한 형상에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다. 얼굴 모습도 여느 불상과는 달리 시골의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표정이고, 오랫동안 가부좌로 앉아 계시니 다리가 저려 슬그머니 바른쪽 다리를 풀어 놓은 그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다. 인자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이런 불상은 아무데서나 친견할 수 없다.
운문사의 은행나무와 반송과 비로전 부처님이 부르시기에 이따금 나는 그곳에 간다.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
지혜로운 이가 부지런해서
게으름을 물리칠 때는
지혜의 높은 다락에 올라
근심하는 무리들을 내려다본다
마치 산 위에 오른 사람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