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에서
도서명 | 텅 빈 충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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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한두 차례씩 겪는 일이지만, 며칠 전 태풍 ‘베라’가 지나갈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농경지나 가옥의 침수와 매몰이며 막대한 재산 피해를 가져오는 그런 태풍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산에 살면서 번번이 겪은 내 경험에 따르면, 큰 비바람이 휘몰아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미리 보이는 조짐이 있다. 이번에도 태풍이 오기 2, 3일 전에, 하늘이 마치 비로 쓸어놓은 것 같은 그런 구름이 연하게 깔리었고, 개미떼들의 큰 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태풍이 있는 날 아침 정랑(변소)에 가니 전에 없이 박쥐가 낮게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기상대의 예보를 들을 것도 없이 어김없이 태풍이 온다.
그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께까지 거센 비바람이 산을 휩쓸었다. 용마루의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고, 들에 무성하던 파초가 갈기갈기 짓기고 꺾이었다. 여기서 우지끈 저쪽에서 우지끈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뜰 앞에 서 있는 장명등(長明燈) 꼭지가 어느새 떨어져 나가고, 나무 비늘에 근으로 매어 덮어둔 비닐 우장이 펄럭이다가 뒤꼍 나뭇가지에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낸다.
뒷마루에 놓아둔 신문지 상자가 날려 여기저기 어지럽게 물 먹은 종이가 널리었다. 대숲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온몸을 떨면서 거센 비바람에 소용돌이치며 휩쓸렸다. 떨어진 나뭇잎에 수채가 막혀 물이 넘치는 걸 보고 뛰어나갔다가 우산도 날려버리고 흠뻑 젖은 채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속수무책(束手無策). 거센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사람은 너무도 무력하다. 자연이 크게 진노하여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내 안에서도 거센 바람이 일렁이려고 했다. 공연히 화가 치미는 것이다. 옛날에 본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나온 영화인데, 말짱하던 사람이 아라비아 해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거칠어져서 자기 아내에게 곧잘 손찌검을 하였다. 바람이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런 날은 정말이지 산 위에 사는 일이 아주 싫다.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공연히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려고 한다. 혼자서 투덜투덜 욕지거리를 쏟아놓아도 개운치가 않다.
이런 대는 생각을 크게 돌이켜야 한다. 내가 화를 내면 내 자신이 안팎으로 피해를 입게 되니까. 시작이 있는 것은 그 끝이 있게 마련, 태풍도 불 만큼 불다가 잦아질 때가 있으리라.
그렇다. 이런 날이야말로 순수한 ‘내 날’이 될 수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불청객들도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으리라. 젖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속옷 바람으로 홀가분하게 있자.
전기도 나가버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비바람. 자, 뭘하지? 그렇다. 소설이나 읽자. 이런 날은 소설이나 읽어야지 엄숙한 일은 격에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락에 올라가 더듬더듬 손에 잡히는 책을 뽑아드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이 <희랍인 조르바>였다.
마침 잘 되었다. 굵직굵직한 카잔차키스의 선(線)을 나는 좋아한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오늘 기연이다 싶어 다시 펼치기로 했다. 창가에 등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읽자. 소설을 누가 뻣뻣이 앉아서 읽는단 말인가.
책장을 펼치자 거기에서도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남유럽 쪽으로 부는 세찬 비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카페 안에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그 항구에서 산투리(기타 비슷한 악기)를 끼고 있는 조르바를 만나 이야기 끝에 ‘나’는 이렇게 술회한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덜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나는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두 손은 못이 박히고 터지고 일그러진 데다 힘줄이 솟아 있었다.“
조르바가 쓰는 단순하고 소탈한 말에 견줄 때, 복작하고 시끄럽고 닳아진 현대문명 속에서 사는 오늘 우리들의 미끈한 말이 얼마나 허황하게 울리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연장과 악기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손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손이 아닐까 싶다.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 데려다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가데 하는 곳은 없으리라.”
죽기 전에 이런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지난 8월 중순 한 달 가까운 수련회를 끝내고 우리 임원들끼리 쌓인 피로를 씻기 위해 여수에 있는 친지네 집을 찾아갔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배를 하나 빌려 두 시간 가까이 이 섬 저 섬을 끼고 돌면서 오랜만에 바다를 가까이했었다. 맑은 바다의 수평을 대하니 기복과 굴곡이 있는 산에서 다져진 마음이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열리었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 얼굴이 있다. 산에 갇히면 든든하긴 하지만 막히기 쉽고, 바다에서 놀면 툭 트인 맛은 있지만 무료하거나 자칫 허황해지기 쉽다. 산과 바다가 알맞게 어울릴 때 의지와 감성의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소설의 이야기,
“배 위에는 탐욕스럽게 굴리는 교활한 악마의 눈망울, 행상이 파는 허접쓰레기 물건 같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며 가득 타고 있었다. 이들이 다투는 소리는 흡사 조율이 안 된 피아노, 정직하지만 심술궂은 여자들의 바가지 같았다. 성질대로 한다면, 두 손으로 배의 이물과 고물을 붙잡고 바닷물에 푹 담가 술렁술렁 흔들어 복작거리는 산 것들 - 인간, 쥐, 벌레들을 깡그리 씻어내고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건져 올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따금씩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기발하고 신선한 이 구절을 읽으면서 퍼뜩 태풍이 휘몰아치는 의미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저지른 오만을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자연은 숨겨둔 위력을 발휘하여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분수와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도 생각이 미쳤다. 자연을 형편없이 허물고 짓밟고 더럽힌 인간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처럼 거센 비바람을 풀어 씻어내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마치 덜된 인간들이 타고 가는 복작거리는 배의 이물과 고물을 거인의 손으로 붙들어 바닷속에 푹 집어넣었다가 덜어버릴 것을 덜어내고 다시 깨끗한 지구를 만들려고 하듯이.
비바람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도저히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등산용 버너를 켜서 차를 한 자 마시고는 점시도 건너뛰었다. 밥 한 끼 거른다고 사람이 죽겠는가. 밥 대신 ‘조르바’를 홀린 듯이 ‘먹으면서’ 배고픈 줄을 몰랐다.
조르바가 물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물음이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낸 게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
산에 살면서 번번이 겪은 내 경험에 따르면, 큰 비바람이 휘몰아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미리 보이는 조짐이 있다. 이번에도 태풍이 오기 2, 3일 전에, 하늘이 마치 비로 쓸어놓은 것 같은 그런 구름이 연하게 깔리었고, 개미떼들의 큰 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태풍이 있는 날 아침 정랑(변소)에 가니 전에 없이 박쥐가 낮게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기상대의 예보를 들을 것도 없이 어김없이 태풍이 온다.
그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께까지 거센 비바람이 산을 휩쓸었다. 용마루의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고, 들에 무성하던 파초가 갈기갈기 짓기고 꺾이었다. 여기서 우지끈 저쪽에서 우지끈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뜰 앞에 서 있는 장명등(長明燈) 꼭지가 어느새 떨어져 나가고, 나무 비늘에 근으로 매어 덮어둔 비닐 우장이 펄럭이다가 뒤꼍 나뭇가지에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낸다.
뒷마루에 놓아둔 신문지 상자가 날려 여기저기 어지럽게 물 먹은 종이가 널리었다. 대숲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온몸을 떨면서 거센 비바람에 소용돌이치며 휩쓸렸다. 떨어진 나뭇잎에 수채가 막혀 물이 넘치는 걸 보고 뛰어나갔다가 우산도 날려버리고 흠뻑 젖은 채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속수무책(束手無策). 거센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사람은 너무도 무력하다. 자연이 크게 진노하여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내 안에서도 거센 바람이 일렁이려고 했다. 공연히 화가 치미는 것이다. 옛날에 본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나온 영화인데, 말짱하던 사람이 아라비아 해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거칠어져서 자기 아내에게 곧잘 손찌검을 하였다. 바람이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런 날은 정말이지 산 위에 사는 일이 아주 싫다.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공연히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려고 한다. 혼자서 투덜투덜 욕지거리를 쏟아놓아도 개운치가 않다.
이런 대는 생각을 크게 돌이켜야 한다. 내가 화를 내면 내 자신이 안팎으로 피해를 입게 되니까. 시작이 있는 것은 그 끝이 있게 마련, 태풍도 불 만큼 불다가 잦아질 때가 있으리라.
그렇다. 이런 날이야말로 순수한 ‘내 날’이 될 수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불청객들도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으리라. 젖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속옷 바람으로 홀가분하게 있자.
전기도 나가버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비바람. 자, 뭘하지? 그렇다. 소설이나 읽자. 이런 날은 소설이나 읽어야지 엄숙한 일은 격에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락에 올라가 더듬더듬 손에 잡히는 책을 뽑아드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이 <희랍인 조르바>였다.
마침 잘 되었다. 굵직굵직한 카잔차키스의 선(線)을 나는 좋아한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오늘 기연이다 싶어 다시 펼치기로 했다. 창가에 등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읽자. 소설을 누가 뻣뻣이 앉아서 읽는단 말인가.
책장을 펼치자 거기에서도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남유럽 쪽으로 부는 세찬 비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카페 안에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그 항구에서 산투리(기타 비슷한 악기)를 끼고 있는 조르바를 만나 이야기 끝에 ‘나’는 이렇게 술회한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덜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나는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두 손은 못이 박히고 터지고 일그러진 데다 힘줄이 솟아 있었다.“
조르바가 쓰는 단순하고 소탈한 말에 견줄 때, 복작하고 시끄럽고 닳아진 현대문명 속에서 사는 오늘 우리들의 미끈한 말이 얼마나 허황하게 울리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연장과 악기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손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손이 아닐까 싶다.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 데려다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가데 하는 곳은 없으리라.”
죽기 전에 이런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지난 8월 중순 한 달 가까운 수련회를 끝내고 우리 임원들끼리 쌓인 피로를 씻기 위해 여수에 있는 친지네 집을 찾아갔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배를 하나 빌려 두 시간 가까이 이 섬 저 섬을 끼고 돌면서 오랜만에 바다를 가까이했었다. 맑은 바다의 수평을 대하니 기복과 굴곡이 있는 산에서 다져진 마음이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열리었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 얼굴이 있다. 산에 갇히면 든든하긴 하지만 막히기 쉽고, 바다에서 놀면 툭 트인 맛은 있지만 무료하거나 자칫 허황해지기 쉽다. 산과 바다가 알맞게 어울릴 때 의지와 감성의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소설의 이야기,
“배 위에는 탐욕스럽게 굴리는 교활한 악마의 눈망울, 행상이 파는 허접쓰레기 물건 같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며 가득 타고 있었다. 이들이 다투는 소리는 흡사 조율이 안 된 피아노, 정직하지만 심술궂은 여자들의 바가지 같았다. 성질대로 한다면, 두 손으로 배의 이물과 고물을 붙잡고 바닷물에 푹 담가 술렁술렁 흔들어 복작거리는 산 것들 - 인간, 쥐, 벌레들을 깡그리 씻어내고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건져 올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따금씩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기발하고 신선한 이 구절을 읽으면서 퍼뜩 태풍이 휘몰아치는 의미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저지른 오만을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자연은 숨겨둔 위력을 발휘하여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분수와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도 생각이 미쳤다. 자연을 형편없이 허물고 짓밟고 더럽힌 인간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처럼 거센 비바람을 풀어 씻어내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마치 덜된 인간들이 타고 가는 복작거리는 배의 이물과 고물을 거인의 손으로 붙들어 바닷속에 푹 집어넣었다가 덜어버릴 것을 덜어내고 다시 깨끗한 지구를 만들려고 하듯이.
비바람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도저히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등산용 버너를 켜서 차를 한 자 마시고는 점시도 건너뛰었다. 밥 한 끼 거른다고 사람이 죽겠는가. 밥 대신 ‘조르바’를 홀린 듯이 ‘먹으면서’ 배고픈 줄을 몰랐다.
조르바가 물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물음이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낸 게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
<86 . 10>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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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
이 책이 출간이 된지가 1989년 6월 24일이니깐
꼭 21년이 되었습니다.
이 공간에 글을 올리기 위하여 책장 속에서 케케묵은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을 꺼내어 툭툭 먼지를 털어내니
지난 세월의 무게가 느껴 집니다.
조금은 촌스러운 듯한 책표지이면 누렇게 퇴색이 되어 버린 종이,
그리고 조그맣게 신경을 조금은 더 써야 보이는 활자체들이......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떠올리면서 하나 하나 새김질을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