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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流花開

오작교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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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텅 빈 충만

    산 위에는 벌써 낙엽이 지고, 산 아래 양지쪽에만 물든 잎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해질녘 뜰에 내리는 산그늘이 썰렁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정랑(淨廊)을 새로 짓느라고 한동안 바빴다. 변소를 절에서는 예전부터 정랑이라고 부른다. 산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휩쓸리다보니 어느새 낙엽이 지고 찬 그늘이 내리게 된 것이다.

    그전에 엉성하게 지어진 허름한 집이라 버팀목을 세우고 기와도 갈곤 했지만, 폭풍우가 불어 닥칠 때면 흔들거리고 자꾸만 기우는 바람에 다시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큰 절에 법당과 박물관 신축 등 큰 불사가 진행 중이므로, 일을 따로 벌이지 않고 묻힌 김에 하니 힘이 덜 들었다.

    그전처럼 한 평 남짓 조그맣게 지으려고 했는데, 큰절 총무 현고 스님의, 기왕에 새로 지으면서 좀 넉넉하게 쓸 수 있도록 하자는 뜻에 따르기로 했다.

    집을 지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먹고 산다는데 왜 이리 복잡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먹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내보내는 공간이 따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옥의 경우는 지붕 밑 한쪽에 붙여놓으면 되지만, 한옥은 따로 떼어서 멀찍이 세워야 한다. 사돈네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우리 속담도 있을 정도니까.

    때마침 바쁜 농사철이라 일꾼을 얻을 수가 없어 큰절 목수들이 몸소 자재를 져 날랐다. 기와를 나르는 데는 일꾼들 손을 빌려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좀 뜸해진 그제부터 올려다 덮기 시작했다. 모자란 기와를 강진에 있는 기와막에서 어제 실어왔으면 오늘로써 일이 끝나게 될 것이다. 지난달 12일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달포가 걸린 셈.

    대숲에 들어앉은 정랑이 이 암자에서는 그중 운치 있는 집이 되었다. 그리고 제대로 배우고 익힌 목수들의 손으로 지어진 집이라 절에 있는 정랑의 건축양식으로 뒷날 한 표본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연전에 돌아가신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노스님께서는, 정랑을 해우소(解優所)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온갖 근심 걱정을 푸는 곳이라는 뜻에서다. 유머의 감각이 뛰어난 노스님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집을 거쳐 간 사람마다 근심 걱정이 있으면 다 풀어버리고 가볍고 빈 마음으로 산을 내려가라고, 기둥을 세우고 보를 올리던 날 나는 속으로 축원을 했다.

    가을 산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큰절은 노상 장바닥을 이루고 있는데, 그 여파가 산 위에까지 미치고 있다. 사람은 그 계층이 각양각색이라 만나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언동을 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내 첫 인사 말이다.

    “그저 와 보았어요.”

    “큰절까지 왔다가 한번 올라와 보았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같이 말하면서 기웃거리다가 이내 내려가 버린다. 아무 구경거리도 없는 어설픈 암자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간혹, 좋은 말씀 듣고 싶어 왔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한결같이 산이나 바라보다가 가시라고 일러준다. 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내게 좋은 말이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말이기로 자연에 견줄 수야 있겠는가. 자연만큼 뛰어 난 스승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말이란 자연에서 치면 한낱 파리나 모기 소리와 같이 시끄러움일 뿐이다.

    산에 오면 우선 그 사람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한다. 되지도 않은 말의 장난에서 벗어나 입 다물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가지 밖으로만 팔았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한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둘레를 바라보면서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일랑 그만두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알량한 말로 인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눈멀어 왔고 귀먹어 왔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남의 얼굴만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남의 말에 팔리지 말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이룰 수 없다. 자연은 때묻고 지친 사람들을 맑혀주고 쉬도록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품안에 가까이 다가가 안기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닮아지고 관념화되어 꺼풀만 남은 오늘의 우리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

    언젠가 학생인 듯한 젊은이가 찾아와 불쑥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 어디냐고 물었다.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다!”라고 했더니 그는 어리둥절해 했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곳이 어디이겠는가? 물론 산에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른다. 그러나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곳이 굳이 산에만 있으란 법은 없다. 설사 도시의 시멘트 상자 속 같은 아파트일지라도 살 줄 아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삶에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고 그 둘레에는 늘 살아 있는 맑은 물이 흐를 것이다.

    사람은 어디서 무슨 일에 종사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살건 간에 자기 삶 속에 꽃을 피우고 물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 사는 일이 무료하고 지겹고 시들해지고 만다.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를 두고 딴 데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 그러기 때문에 저마다 지금 바로 그 자리가 자기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임제 선사가 어느 날 법좌에 올라 말했다.

    “살아서 움직이는 지금이 이 육신에 자유자재하게 활동하는 한 ‘무위(武威)의 진인(眞人)’이 있어 항상 그대들의 오관으로 드나든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똑똑히 보라!”

    이때 한 스님이 앞으로 나와 선사께 물었다.

    “무위진인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선사는 법좌에서 내려와 그의 멱살을 붙들고 ‘어서 말해보라, 어서 말해봐!’ 하고 큰소리로 다그쳤다.

    그러나 그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이때 선사는 ‘이 무위진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말라빠진 똥막대기로군’ 하고 밀쳐버렸다.

    어떤 계급이나 계층에도 소속되지 않은 진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자리에 있는 그대 아닌가. 지금 이 자리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그대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디서 찾고 있느냐는 꾸짖음이다.

    장부는 저마다 하늘이라도 찌를 기상을 지니고 있으니, 설사 성자의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길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겠다는 주장과 같다. 남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만이 무위진인이라 부를 수 있다.

    어제 기와를 실어왔는지 일꾼들이 짐을 지고 올라오는 소리가 저 아래서 들려온다. 나가서 거들어야겠다. 오늘로 일을 마치고 나면, 내 속뜰에도 꽃이 피고 물이 흐르도록 해야겠다.

    내 생애에서 또 한 해가 빠져 나간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인가?

<86 . 12>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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