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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성이 변하네

오작교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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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텅 빈 충만

    오늘이 절후로는 가장 춥다는 소한인데 봄날처럼 푸근하다. 대숲 머리로 떠오른 산빛이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르듯 아련하다. 수첩을 펼쳐보니 지난해 소한은 서울이 영하 16도 6부이고 우리 불일은 영하 13도였다. 물론 늦추위가 없지 않겠지만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지금으로는 덜 춥다.

    남쪽에는 눈다운 눈도 아직 내리지 않았다. 겨울비만 몇 차례 내려 메마르기 시운 땅을 촉촉이 적시었다. 첫눈이 내리면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막연히 헤어진 사람들에게는 그 만난 날은 아직도 기약이 없다.

    자취생활을 시작한 지 열두 번째 겨울을 맞고 있는 처지로는 춥지 않은 겨울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추위 속에서는 끓여먹는 일이 너무 머리 무겁다. 미적미적 미루면서 게을러빠지기 쉽다. 이런 미지근한 겨울 날씨가, 지난여름 세일 때 밍크코트며 부처를 사놓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만일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자취생한테는 참으로 다행하다.

    세월이 지나가면 개인의 취미와 취향이 달라지듯이 식성도 바뀌는 것 같다. 한동안 맛있게 먹던 음식이 이제는 별로 구미에 당기지 않고, 전에는 별로 가까이하지 않던 것들에서 새로운 미각을 찾는 수가 있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나는 국수와 빵을 참으로 많이 먹었다. 남들이 몇 생을 두고 먹을 그런 양을 요 10년 사이에 먹은 것이다. 봄부터 초가을까지 저녁은 으레 국수를 삶아 먹었다. 처음에는 표고버섯과 양배추로 조채를 만들어 비볐지만, 뒤에는 그것도 번거로워 맨 간장을 쳐서 김치에다 먹었다. 조채가 적을수록 국수의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가장 맛있는 국수는 알맞게 삶은 후 우물가로 가져다 샘물로 헹군 다음, 바로 그 자리에서 손으로 집어먹을 때이다.

    가장 맛없는 국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국수, 음식 만드는 정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며칠 동안 표류해 다니면서 불대로 불어터진 그런 국수를 선 채로 긁어 넣을 때, 나는 새삼스레 인간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몇해 전 영동고속도로 소사 휴게소에서 먹은 보리국수만은 예외로 치고.

    어느 절에서는 국수는 별미로 즐긴다. 그래서 국수가 스님들 사이에는 ‘승소(僧笑)’로 통한다. 국수 공양이 있다고 하면 좋아서 빙그레 웃는다는 뜻에서다. 이런 승소가 웬일인지 내게는 지난해부터 전혀 먹히지 않는다. 작년에 가져다 놓은 국수가 고방에 그대로 남아 해를 넘겼다.

    방도 산에 들어와 자취를 하면서 어지간히 먹었었다. 아침은 으레 방이었다. 서울, 부산, 관주, 순천 등지의 제과점이나 호텔 식빵은 거의 안 먹어 본 것이 없을 정도니까. 처음 빵을 먹게 된 연유는 이렇다. 산에 들어온 첫해 가을 아는 수녀님이 오시면서 빵을 가져왔는데, 마가린을 발라 프라이팬에 구워준 구수한 그 맛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수녀님이 산을 내려간 다음, 남은 빵을 몽땅 구워 여섯 쪽을 먹고 두 쪽은 더 먹을 수 없어 남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부터 빵을 열심히 먹기 시작, 처음에는 네 쪽씩 먹었다가 세 쪽으로, 다시 두 쪽으로 줄었다. 이렇게 왕성하게 먹던 빵이 지난해부터는 시들해졌다. 어디서 빵이 들어오면 큰절로 내려 보내는 요즘이다.

    물미역도 무척 많이 먹었었다. 한겨울 시큼한 김치만 먹다가 물미역을 대하면 비릿한 갯내가 구미를 돋구었다. 끼니때가 되어 부엌으로 끓여 먹으러 들어가 밥을 안쳐놓고 나서 먼저 물미역을 씻어 초고추장에 찍어 맨입으로 한 접시씩 먹었다. 물미역을 먹으면서 나는 가끔 바위 기슭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의 날갯짓이며 아득한 수평선에 대한 환상에 젖어 문득문득 바다로 내닫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요즘은 거의 양식 미역이지만 그전에는 바위에 붙어 자생하는 미역이라, 음력 정초면 그 부드럽고 단맛을 볼 수 있었다. 물미역은 거세지기 전이 제 맛이다. 잎보다도 오돌오돌 먹는 줄기가 훨씬 맛있다. 끓는 물에 데치면 제 맛이 안 나고, 생미역 그대로 소금을 조금 뿌려 찬물에 씻어내면 느른한 곱이 빠지고 꼬들꼬들한 생미역 맛을 낼 수 있다.

    정월 보름 겨울 안거가 끝나는 대로 바닷가에 가까운 절을 찾아가 물미역을 실컷 먹던 기억이, 지금은 저 세상 일처럼 아득해졌다. 이번 겨울부터는 이 물미역도 먹히지 않는다. 너무 많이 먹어 물린 모양인가.

    과일 중에는 배가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도 한겨울에 먹는 나주산 이마무라, 겉은 툭툭 불거져 못생겼지만, 속은 연하고 달고 물이 많아 시원한 그 맛이 일품이다. 추운 겨울에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 배를 깎아 먹는 맛은 아는 사람이나 알 것이다.

    처음 배맛을 들이게 된 것은 20년 전 봉은사 다래헌에서 법안 스님과 함께 지낼 때였다. 절 곁에 배밭이 있었는데(지금은 거기 아파트가 들어섰다) 스님이 배를 좋아해서 한 접씩 사놓고 먹으면서부터 배맛을 알게 되었다. 뱃속같이 시원하다는 말이 있지만 법안 스님은 그런 분이다. 지금은 뉴욕에서 원각사라는 절을 만들어 그곳 교민들을 교화하고 있는 그리운 도반(道伴)이다.

    내가 배를 좋아하는 줄 알고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약수암이 현문 스님은 배를 한 상자씩 사서 자기 시봉들 편에 지워서 우리 불임암까지 보내준다. 배가 아이들 머리통만큼 크기 때문에 혼자서는 먹을 엄두를 못 내다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야 함께 먹었다. 배를 먹으면서 나는 이런 농담을 곧잘 했다. 어디 배씨가 양반인 줄 아느냐고 물으면 다들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면 나는 시치미를 떼고 나주 배씨인데 그중에도 ‘이무라파’라고 하면서, 우리는 바로 지금 그 양반 배씨를 먹는 중이라고 한다. 물로 좌중에 배씨 성을 가진 분이 없을 때 한해서다.

    이렇듯 맛있게 먹던 배가 웬일인지 지난겨울부터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지난번에 가져온 배도 아랫절로 내려 보내고 말았다. 그 대신 요즘에는 사과가 먹힌다. 그전에는 사과만 먹으면 목구멍이 간지럽고 메스꺼워 별로 손을 대지 않았었다. 백건우 씨가 지난가을 내 산거에 왔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사과 알레르기가 있어 그런다는 말을 듣고 동병상련의 위로를 받았는데, 올 겨울부터는 배 대신 사과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이 글을 써놓고 나서 사과를 나나 깎아 먹어야겠다.

    이제는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해야겠다. 산에서 담담히 살다보면 먹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먹고 싶은 게 뭐냐고 굳이 누가 묻는다면 향기로운 차라고나 할까. 이따금 시중에 나가면 아이스크림을 거르지 않고 사먹었다. 무슨 약을 섞는지 먹을수록 더 갈증 나게 하는 것이 아이스크림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가 얼얼하도록 사먹었다. 막대에 꽂힌 ‘바밤바’를 다섯 개씩 먹은 기록이 있다.

    몇해 전 성철 종정스님의 법어집을 출간하는 일로 서울에 가서 머물 때, 한방에서 일을 하던 원택, 원융 스님과 함께 우리는 밤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무슨 행사처럼 반드시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먹었다. 탕에서 먼저 나온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일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이제는 이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얼마 전 광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대했는데 기침이 나와 한 개를 겨우 먹었었다.

    내 식성은 촌놈에다 토종이라 마요네즈나 토마토케첩 같은 것은 비위가 상해 전혀 먹을 수가 없다. 먹는 음식으로써 그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요즘에는 호박죽을 한 통씩 쑤어 두었다가 아침저녁으로 그걸 데워서 먹는다. 먹고 치우는 데 단 10분밖에 안 걸린다. 먹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는 것이 자취생에겐 너무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시간 귀한 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87 . 1>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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