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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중이나 되었으면

오작교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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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텅 빈 충만
“사람의 목숨 허무해라 물거품일세
80년 한평생이 봄날의 꿈이어라.
인연 다해 이 몸뚱이 버리는 이날
한 덩이 붉은 해가 서산으로 진다.“ 

    고려 말 태고 화상의 임종의 노래다. 다른 사람들로는 몇 생을 산다 할지라도 그만큼 살 수 없는 알차고 빛난 생을 누렸으면서도 한평생이 봄날의 꿈같다고 하니, 생명의 덧없음이 우리에게까지 다가서는 것 같다.

    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함석헌 선생님께서 어느덧 고인이 되셔서 그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니, 새삼스레 삶이 허무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도 언젠가는 자기 삶의 그림자를 이끌고 태초 생명의 그 바다로 돌아갈 것이지만.

    함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종로에 있던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였다. 사장인 장준하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나보다 한 걸음 늦게 사무실로 들어오시는 함 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가 한일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던 6·3사태가 있던 그해 봄이었다. 그날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꼬장꼬장한 모습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정진하던 때였다.

    두 번째는 함 선생님께서 미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하기 직전 <뜻으로 본 韓國歷史>를 다시 손질하기 위해 해인사의 한 암자(金仙庵)에 들어와 계실 때였다. 이 무렵에는 자주 뵙고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해인사 큰방인 궁현당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전대중이 말씀을 듣게 된 자리를 갖기도 했었다. 주제는 한국의 종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였는데, 그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매서운 채찍질을 해주었다. 젊은 스님들한테는 적잖은 일깨움이 되어 주었다.

    70년대에 들어서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來軒) 시절, ‘민주수호 국민협의회’와 ‘씨알의 소리’ 일로 거의 주일마다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었다.

    그때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는 주로 면목동 전세방에서 살던 장준하 선생님 댁과 신촌의 김동길 박사 댁과 내 거처인 봉은사 다래헌으로 옮겨 다니면서 열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정보기관에서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편집위원들의 신경은 자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은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 중인 장면을 목격한 나는, 홧김에 그 전화기를 빼앗아 그의 면전에서 돌에 박살을 내버렸었다. 그때의 우리들은 피차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이런 모임이 아니고도 함 선생님께서는 이따금 우리 다래헌에 들르셨다. 차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마시면서 마하트마 간디며 칼릴 지브란이며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미국에 가셨을 때인데, 함 선생님을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사가 함 선생님 얼굴을 뻔히 보더니 칼릴 지브란을 닮았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함 선생님께서 <예언자>를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했더니 아주 반기면서 정식으로 악수를 청하더라고 하셨다.

    함 선생님께서 주관하는 퀘이커 모임을 우리 다래헌에서 연 적도 있었다. 나도 그때 한 곁에 앉아 참석하면서 번다한 종교적인 의식도 없고, 마치 참선과 같은 퀘이커 모임을 처음 알게 되었었다.

    그 무렵 함 선생님은 노인답지 않게 아름다움 앞에 천진스런 면모를 자주 드러내셨다. 뜰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눈여겨 살피면서 꽃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원효로 집에 그 손바닥만 한 뜰과 온실에 여러 가지 화초를 손수 가꾸셨던 걸 보아도 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한번은 꽃삽과 호미를 가지고 아서 다래헌 곁에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머위를 옮겨가기도 하셨다. 머위 이파리의 쌉쌀한 그 맛을 좋아하셨다.

    초파일 때 만든 연꽃등을 우리 방에 달아두었는데, 한번은 그걸 유심히 쳐다보시면서 ‘거 참 곱다. 거 참 잘 만들었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셨다. 가시는 길에 떼어서 드렸더니 어린애처럼 좋아라 하셨다.

    1975년 가을 내가 거처를 조계산 불일암으로 옮겨오게 되자 내 산거(山居)에 한번 오시고 싶다는 서신을 보내왔었다. 오셔서 쉬어 가시라는 회신을 이내 보내드렸더니, 15~16인 되는 장자모임 회원들과 함께 오시게 되었다.

    회원들은 아랫절(송광사)에 묵도록 하고 함 선생님은 나랑 같이 우리 불일암에 올라와 하룻밤 주무시게 되었다. 그때 많은 말씀 중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도 젊다면 산속에 들어와 중이나 되었으면 좋겠소.”

    그때 어떤 심경에서 하신 말씀인지는 몰라도, 아주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무렵 안팎으로 몹시 지쳐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나도 중이나 되었으면······’ 하시던 그때의 그 말씀이 함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한동안 그림자처럼 뒤따르곤 했다.

    그리고 나는 이때 함 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다 알다시피 함 선생님은 하루 한 끼 밖에 안 자셨다. 그것도 저녁을. 그때는 내가 불일암으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어, 양식은 있었지만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그릇과 수저가 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더욱 그랬다.

    함께 온 회원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밥 대신 감자를 삶아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해서 감자를 한솥 삶았었다. 젊은 사람들은 별식이라 좋았겠지만, 하루 한 끼 밖에 안 드시는 노인이 감자로 끼니를 대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일이었다. 겨우 두 갠가 드시고는 더 안 드셨다.

    이때 일이 두고두고 나를 후회하게 했다. 따로 밥을 지어드려야 했었는데, 융통성이 없이 꼭 막힌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나는 함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예를 드리지 못한 허물을 지었다. 그때가 안거 중인데다 영결식날 하필 정에서 예정된 행사가 있어, 인편에만 조문을 대신케 하고 참석치 못하고 말았다. 고인과 유가족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함석헌 선생님과 같은 큰 어른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의 삶이란 그 자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세계를 통해서 거듭거듭 형성된다. 이런 사실을 상기할 때, 함 선생님은 어렵고 험난한 우리 시대의 큰 스승으로 우리들 가슴속에서 오래오래 삶을 함께 하리라 믿는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89 . 4>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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