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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일축하

오작교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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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텅 빈 충만
    암자를 비워둔 채 산을 떠나 있다가 꼬박 한 달 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 두어 차례, 갈아입을 옷가지와 연락하고 챙길 일이 있어 다녀갔었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고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10여년 남짓 몸담아 살아온 집인데도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넋이 되어 예전에 살던 집을 돌아보러 온 것 같았다. 사람이 거처하니 않는 빈집이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육신과 같아서 아무런 표정도 생기도 없다.

    가끔은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볼 일이다. 자신의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의 그 빈자리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행연습을 통해서 너저분한 일산의 집착에서 얼마쯤은 벗어나게 될 것이다.

    암자에 돌아오니 둘레에 온통 진달래꽃이 만발이었다. 군불을 지펴놓고 닫혔던 창문을 활짝 열어 먼지를 털고 닦아냈다. 이끼가 긴 우물을 치고 마당에 비질도 했다. 표정과 생기를 잃었던 집이 부스스 소생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아야 집도 함께 숨을 쉬면서 그 구실을 하는 모양이다.

    아래채 창문이 흥부네 집처럼 온통 뜯겨 있다. 빈 집에 찾아온 사람들이 방안에 무엇이 있나 창문을 뚫고 엿본 흔적이다. 번번이 겪는 일이지만, 무례한 그런 행동에 불쾌를 느낀다. 풀을 쑤어 창문을 발라야 하는 일거리가 결코 달갑지 않다.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한 달을 밖에서 지낸 것. 그러니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삶은 무료해진다. 삶이 무료해지면 인생 자체가 무의미 하고 무기력하다.

    그동안에 쌓인 우편물 속에서 한 친지의 향기로운 마음씨가 굳어지려는 내 마음에 물기를 보태주었다. 연초록빛 카드 겉장에는 무슨 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잎이 달리 생화를 눌러서 붙인 아주 정감어린 디자인.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스님. 생신을 축하 올립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어 저의 생도 의미를 지닐 수 있었기에 참으로 저에게도 뜻있는 날입니다.

    저를 길러주신 할머니께서는 늘 절 구경을 다니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몰래 한푼 두푼 모으신 돈이 여비가 될 만하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제가 털어가곤 하였습니다. 그때의 제 사술이란 ‘할머니, 제가 이다음에 돈 벌어 절에 모시고 갈게요’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선 제 손으로 월급을 받아오기 훨씬 전에 저쪽 별로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제가 첫 월급을 타던 날, 누군가가 곁에서, 어머님 내복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내의를 사드릴 어머님도, 할머님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울음으로도 풀 수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스님의 생신에(제가 잘못 알고 있어 음역 2월 보름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만)무엇을 살까 생각하다가 내의를 사게 된 것은, 언젠가 그 울름으로도 풀 수 없는 외로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을 짚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스님께선 제 혼의 양식을 내주신 분이시기도 하니까요. 다시 한 번 축하 올립니다. 스님!    
아무개 올림>

    봄볕이 들어온 앞마루에 앉아 이 사연을 두 번 읽었다. 함께 부처 온 봄 내의를 매만지면서 대숲머리로 울긋불긋 넘어다 보이는 앞산의 진달래에 묵묵히 눈길을 보냈다.

    입산 출가 이래 나는 한 번도 내 생일을 기억한 적도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도 없다. 그것은 출가 수행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간혹 아는 신도들이 생일을 알고 싶어서 요리저리 온갖 유도심문을 하는 수가 있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덫에 걸려들기를 거부해 오고 있다. 그것은 내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절에서 생일잔치를 벌이는 일이 없지 않다. 어떤 노스님이나 주지 스님의 생일날에는 극성스런 신도들이 떼 지어 와서, 대중공양을 내면서 희희덕거리고 수선을 떠는 수가 더러 있다. 심지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생일잔치까지 효성스런 제자들에 의해 차려지기도 한다.

    출가 수행자인 중한테 생일잔치란 살아서건 죽어서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여겨지는 것이 우리와 같은 괴팍한 무리들의 문법이다. 출가 수행자는 이미 세속의 집에서 뛰쳐나왔기 때문에 묵은 집 시절의 생일이 당치않고, 도 출가 수행자는 모든 세속적인 인습과 타성에서 거듭거듭 헤치고 출가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정된 날을 생일로 칠 수가 없는 것이다.

    굳이 생일이 있어야 한다면 날마다 생일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를 실현하려는 구도자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엄마 뱃속에서 빠져나온 귀빠진 날에 자신이 뭐 잘났다고 앉은 자리에서 넙죽넙죽 생일 축하를 받는단 말인가.

    그래도 그 생일을 축하해야 한다면,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한 생명을 잉태하면서부터 온갖 고통과 근심 걱정을 치러가며 낳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그는 사람의 종자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생일 축하의 노래를 무르려면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내 주민등록상의 생일을 기억하고 카드와 선물까지 보내준 고마운 그 친지는 내가 거래하는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어, 세금계산서에 기재된 생년월일을 기억해 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날은, 매사에 등한했던 우리 부모들의 무성의로 인해 관청에 출생신고를 할 무렵의 가까운 날짜로 오기된 날짜다. 어쩌면 신고를 늦게 하면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일정시대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음력 2월 보름은 불타 석가모니가 80년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든 열반재일로 불가에서는 4대 명절의 하나로 친다.

    생일 축하 카드 속에 든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유년시절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육친 중에서 가장 가까운 분이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년시절의 꿈을 키워갔었다. 그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무서움 때문에 밤의 변소 길에는 반드시 할머니를 뒤따르게 했었다. 예전 시골집은 변소와 사돈네 집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 생일날이면 할머니께서 몸소 방 윗목에 정갈한 짚을 깔아 그 위에 정화수와 음식을 담은 상을 차려놓고 손을 싹싹 비비면서 축원을 하셨다. ‘몇 살 난 어디 성씨 우리 아무개 남의 눈에 잎이 되고 꽃이 되어 무병장수하고···, 일당백으로 총명하고 영특해서···’ 아직도 내 기억에 남은 축원의 낱말들이다.

    어느 해 생일날(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로 기억된다) 무슨 상회인가 하는 옷가게로 내가 입을 옷을 사러 할머니를 따라갔었다. 그 가게에서는 물건을 사면 경품을 뽑게 하여 사는 물건 외에 무엇인가를 곁들여주었다. 할머니는 나더러 경품을 뽑게 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뽑는 경품이었다. 경품의 내용은 지금 책상 위에서 빈칸을 메우고 있는 이런 원고지 한 권이었다.

    최초로 뽑은 경품이 원고지였다니. 내 생애와 원고지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지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요즘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대 그 일이 어떤 암시처럼 여겨진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해인사에서 풋중 노릇을 할 때 돌아가셨다. 뒤늦게 전해 들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아무개를 한번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그대는 출가한 지 몇 해 안되어 곧이곧대로 스스로를 옭아매던 시절이라 그 원을 풀어드리지 못했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불효막심이다. 당사자인 내 자신은 물론 이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호적상의 그 생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축하해준, 친지의 따뜻한 그 마음씨에 동화되어 부질없이 ‘전생 일’을 늘어놓았다.
<89 . 5>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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